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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음악적리얼리즘

2020/03/22

혁오의 새 앨범 커버로 볼프강 틸만스의 사진 <Osterwaldstrasse>가 쓰였다. / 전 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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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혁오의프로필사진

어느덧 6년 차 밴드가 된 혁오(HYUKOH)의 5번째 앨범 <사랑으로>(2020)가 발매되었다. 항상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고 변화를 추구해온 밴드이기에 이번 앨범에서도 당연히 크고 작은 음악적 변화들이 보이지만,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앨범 커버 이미지의 매체적 변화이다. 음악과 더불어 자신들의 음악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까지 직접 챙겨왔던 이들의 행보를 고려했을 때, 이 변화는 혁오의 새 음악을 이해하는 데 꽤 중요한 힌트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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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1월30일에발매된혁오의다섯번째앨범<사랑으로>의커버.볼프강틸만스의사진<Osterwaldstrasse>이커버이미지로쓰였다.

혁오의 새 앨범 커버에는 많이 시든 한 식물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속도로 시들어가고 있는 여러 식물들이 모인 화단을 찍은 볼프강 틸만스의 사진 <Osterwaldstrasse>(2011)가 쓰였다. 첫 앨범 <20>(2014)부터 <22>, <23>, 그리고 <24: How to find true love and happiness>까지, 혁오의 모든 앨범 커버에는 노상호의 드로잉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본다면, 이는 분명 파격적인 변화이다.
우리는 드로잉을 비롯한 회화로부터 어떤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대상의 재현(representation)만을 본다. 노상호가 그린 앨범 커버들을 생각해보라. 노상호는 각각 20세, 22세, 23세, 24세가 된 혁오 멤버들의 생각이나 감정의 몇몇 양태를 이미지화해 재현해낸다. 특히, 그는 혁오 멤버들의 생각이나 감정뿐만이 아니라 해당 앨범의 전반적인 콘셉트와 관련 있는 SNS나 웹상의 이미지들을 커버에 다시 나타낸다 (re-present).
공교롭게도, 이는 혁오의 기존 앨범들이 작동해온 방식과도 닮아 있다. 혁오는 자신들의 경험을 토대로 청춘이나 사랑에 대한 특정한 상(像)을 음악적으로 재현해왔다. 이를테면, <20>의 수록곡 ‘위잉위잉’에서는 불안함이라는 심리적 상태를 하루살이와 같은 구체적 대상이나 의성어, 의태어를 통해 나타냈고, <22>의 ‘Hooka’에서는 잔향을 남기는 코러스와 기타 라인을 이용해 인간관계에 대한 공허함과 회의를 담아내기도 했다. 다시 말해, 혁오는 자주 불안이나 소외, 공허와 같은 청춘의 몇몇 구체적인 지점들을 집어내 음악적으로 재현해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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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오2020월드투어(HYUKOH2020WORLDTOUR)'의서울공연장면

반면, 새 앨범 <사랑으로>의 커버가 사용하는 매체는 사진이다. 사진은 회화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다. 물론, 사진 또한 사실을 오롯이 담아낸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우리는 회화보다는 사진이 실제 대상이나 사건을 더 사실적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철학자 켄달 월튼(Kendall Walton)의 “사진은 투명하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세계를 본다.”라는 단언적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긴 어렵지만, 사진의 사실성을 긍정하는 ‘사진적 리얼리즘’과 같은 담론을 완전히 부정하기 또한 쉽지 않다.
사진의 이러한 실재적 성격으로부터, 우리는 이번 앨범의 음악적 변화의 지향점도 추론해 볼 수 있다. <사랑으로>에서 이들이 들려주는 사랑은 분명 전작과는 조금 다르다. 앨범 라이너 노트에서 “이제 관심과 공감의 지평을 우리 사회가 일상적/정치적으로 갖는 여러 문제적 현상들과 이를 개선하고 극복하기 위한 실천방식으로 넓힌다.”라고 기술했듯, 혁오는 정동으로 가득 찬 낭만적 사랑만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포착한 사랑의 다양한 양태들을 최대한 세심하게 들려준다. 전작들에 비해 가사를 통한 서사의 비중을 줄이고 세밀한 소리들에 보다 귀를 더 기울이게끔 의도한 사운드 메이킹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를 통해, 청자가 특정한 상이 아닌 다양한 소리를 통해 기술되는 사랑의 다양한 풍경을 지각하도록 만든다. 요컨대, 혁오의 새 앨범 <사랑으로>는 사랑에 대한 음악적 재현이 아니라 사랑에 대한 음악적 리얼리즘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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