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실이는 ‘정말로’ 복이 많다
2020 / 05 / 17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프로듀서 ‘찬실’의 삶을 따라가며, 청년 세대를 향해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 이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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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초희 <찬실이는 복도 많지> 2020 포스터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주인공 찬실(강말금 역)은 영화 프로듀서다. 오랫동안 뒤치다꺼리를 해온 감독이 과음으로 느닷없이 사망하자 찬실은 일자리를 잃는다. 유달리 가파른 경사를 자랑하는 동네로 이사할 정도로 앞길이 막막해진 찬실은 궁여지책으로 친한 배우 소피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로 일한다. 어느 날 메이크업 디자이너들이 소피의 집을 방문하는데, 소피는 하루아침에 영화 프로듀서에서 가사도우미가 된 찬실의 상황이 소문날 것을 염려하여 찬실에게 방으로 잠시 숨어 있으라고 한다. 방에서 할 일이 없는 찬실은 도통 소피가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을 꺼내 그 안에서 밑줄 친 문장 하나를 발견한다. “그대가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니, 서 있는 자리마다 모두 참되다.” 이 어록을 남긴 승려는 자신의 주체성을 깨달은 개인이라면 주어진 환경이 무엇이건 돌파할 수 있다고 보았다. 주체성은 자기 위치를 능동적으로 해석할 힘이 되고, 그 힘을 가진 개인은 자유인으로 탈바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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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 내내 찬실이 주체적이지 않은 적이 있었나? 찬실을 주어로 삼는 영화의 서사에서, 우리는 단 한 번도 주체적이지 않은 찬실을 본 적이 없다. 찬실은 한결같이 주체적이었다. 주체적으로 영화판에 뛰어들고, 감독이 영화를 만들 때마다 주체적으로 영화 제작의 살림을 도맡았고, 감독이 죽고 나자 자신을 ‘끈 떨어진 두레박’ 취급하는 박대표에게도 바득바득 할 말을 한다. 그뿐인가? 짝사랑하는 김영이 크리스토퍼 놀란을 좋아한다고 하자 씩씩거리며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미학을 주체적으로 설파하고, ‘난닝구’ 바람으로 동네를 배회하는 장국영의 유령이 자신과 김영의 관계가 잘될 거라는 예언을 날리자 둘의 연애가 잘 풀릴 거라고 나름대로 해석해버린다.
우리는 오히려 딱히 주체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다른 조연들에게서 유복함을 발견한다. 그러나 영화를 감독한 김초희는 영화 편집을 마무리 짓는 과정에서 문득 주인공 찬실이 복이 많은 사람이라 생각했고, 이 생각을 제목으로 삼았다고 한다. 우리가 찬실이라는 주어에서 복을 바라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잣대에 미치건 말건 자기 길 걸어간 영화계의 40대 여성이 보여준 씩씩함에 박수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찬실과 찬실의 모델인 김초희와 찬실을 연기한 강말금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이들이 머물렀던 자리의 부조리를 손쉽게 지워버릴 수 있다. 또 주체성의 신화를 공고히 하여 주어의 자리를 1인석으로 한정하기에, 응원받는 찬실만 남기고 도대체 왜 찬실에게 복이 많다는 것인지 질문할 기회를 놓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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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의 복을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반문할 수 있다. 복 많은 주어는 무슨 수식어를 달고 다녀야 하는 것인가? 남자도 있고, 새끼도 있고, 돈도 있고, 집도 있는 주어가 복된 주어인가? 주체적으로 영화의 문법을 밀고 나간다고 복이 아니고, 주체적인 연애의 문법으로 고백한다고 복이 아니다. 그 결과가 감독의 죽음과 김영의 거절로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설령 반대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서 복은 아닌 것이다. 찬실은 무심코 꺼내든 책의 저자가 외치는 것처럼 자신이 선 자리에서 주어(주체)가 되었기에 복이 많은 것만은 아니다. 찬실은 자신 주변의 여러 주어를 새롭게 발견하여 복이 많은 것이다. 영화 말미에서 찬실은 김영의 호의를 로맨스에 국한된 시그널이 아니라 친절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둘의 관계가 잘 될 거라는 장국영 유령의 말을 연애가 아닌 관계 그 자체에 대한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렇기에 달빛이 밝은 밤 ‘전기다마(전구)’를 찾으러 가는 길의 동반자를 제한하지 않고 모두 데리고 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핸드폰 손전등 기능으로 빛을 비추며 모두를 인도하는 찬실 주변에는 새로이 해석된 주어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 주어들이 다 함께 하산하는 밤, 왠지 수상쩍었던 할머니는 기도를 하고 장국영의 유령은 시종일관 그의 관심사인 영화를 보고 있었다. 주어를 두루 볼 수 있는 복을 찬실에게서 발견한 이 영화의 제목은 그러므로 반어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