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다섯의 파노라마
2020 / 08 / 06
다섯 명의 여성 작가 박윤지, 이수진, 조은지, 차미혜, 차재민이 <파노라마 오브젝트>에 참여했다. / 김 정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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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 오브젝트>전 차재민 섹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가 인간관계의 지표처럼 여겨지던 시대가 있었다. 사람들은 표정, 소리, 색 등으로 마음의 움직임이 표현되었을 때, 그 기호들이 동일한 의미를 공유한다고 믿었다. 플랫폼 자본주의가 일상에 파고든 지금,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카메라’ 또는 ‘컴퓨터 커서’가 자리한다. 물리적 거리가 기술적 조건, 시스템에 의해 조절 가능해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를 매개하는 도구의 사용법은 그 심리적 거리마저 조정한다.
복합문화공간 d/p는 낙원악기상가 건물 4층에 위치해 있다. 실버 세대 전용 영화관을 맞은편에 두고, 인조 넝쿨 식물로 뒤덮여 있는 기이한 외관이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수수께끼 암굴에 진입한 듯,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을 준다. 지금 그곳에서 <파노라마 오브젝트>(7. 7~8. 8)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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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 오브젝트>전 조은지 섹션
조은지의 <변신-돈지악보>는 구제역 파동으로 대량 살상된 돼지의 기름 덩어리를 벽 위에 던져서 생기는 무늬로 악보를 만들고, 소리꾼이 그 악보를 연주한 퍼포먼스의 결과물이다. 심리 상담을 소재로 회화, 영상작업을 발표해온 차재민은 LA카디스트레지던시에서 제작했던 <엘리의 눈>을 출품했다. 치료를 목적으로 한 기술들이 인간 심리에 접근하는 방식을 리서치해 풀어낸 작품이다. 영상은 타인을 바라보는 창으로서의 인간과 동물의 눈, AI 상담사를 교차 편집했다. 미래 사회의 기술이 심리 상담 영역에서 데이터화된 정보를 파악하려고 할 때, 과연 인간의 정신적인 문제를 깊이 있게 대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음산한 사운드 내레이션으로 내뱉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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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 오브젝트>전 이수진 섹션
차미혜의 <더 멀리 더 작은>은 이미지, 사운드, 퍼포먼스, 텍스트로 안과 바깥의 경계 해체를 시도한다. 소리 채집, 분절된 움직임,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탈주 경로로 마치 무중력 공간에 들어와 있는 해방감을 만들어낸다. 이수진의 <글로솔랄리아(glossolalia)>는 잔 다르크, 앙토냉 아르토, 루이스 캐럴 등 언어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발화자를 매개로, 타자와의 소통에 실패하고 부유하는 방언을 모아 인간성의 조건과 언어와의 관계를 되비춘다.(✽편집자 주_‘방언’으로 번역되는 글로솔랄리아는 ‘이해할 수 없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텍스트가 인쇄된 7개의 거울은 빛을 반사하며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작가는 이 그림자를 텍스트의 방언화(글로솔랄리아화)로 간주한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 서툰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이면을 마주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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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 오브젝트>전 박윤지 섹션
박윤지의 <Sightseeing>은 싱글채널 비디오다. 작가는 영상 속 개체들의 움직임을 선형적인 흐름에 따라 관람할 수 있게 초소형 영사실을 구현했다. 고정된 프레임 안에 미세하게 움직이는 시퀀스는 관객으로 하여금 신체적 감각을 최대한 각성시켜 빛과 시간, 움직임에 맞춰 감상한 영상을 각자의 기억 속에서 편집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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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혜 <더 멀리 더 작은> 영상 스틸
독립큐레이터 윤민화는 동시대 이슈를 포착하는 전시기획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의 기획 글은 5명의 여성 작가를 초대해 파노라마적 시야로 세계와의 접속 방식을 펼쳐보이려 고심한 의도가 탄탄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새로운 보기가 원근법적인 위계에서 벗어나 모든 개체를 수평적이고 열린 관계로 접합하고 연결하려는 실험은 수긍할 만하다. 다만, 여성 작가들의 시각이 남성 중심의 원근법적 시각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하는 문제는 여전한 물음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