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미술에 희망을 걸다
2020 / 09 / 08
‘비대면’이 미덕인 시대. 거리미술에서 공감과 소통을 찾는 미술가가 있다. / 이 태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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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 붙은 이태호의 판화.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다. 만남, 대면, 접촉, 대화, 스킨십을 강조하던 과거와는 달리 ‘서로 만나지 말고, 혼자 떨어져 있으라’를 강권하는 세상이 됐다. 될수록 직접 만나 서로 소통하라는 오랜 권고는 오늘날 완전히 뒤집혔다. ‘비대면(untact)’이라는 조어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미덕과 선행이 됐다. 만남은 실례나 위험이 되고 심지어 ‘밀접(密接)’은 악덕이 되었다.
지난 3월 나는 인사동의 한 작은 화랑에서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전시를 앞둔 어느 날 화랑 주인과 만나기 위해 인사동에 나갔다가, 인사동 거리를 보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렇게 텅 빈 거리는 처음이었다. 화랑주가 말했다. “키리코 (Giorgio de Chirico)의 그림 같지요?” 실제로 그랬다. 소실점을 향해 멀어지는 거리엔 사람은 없고 건물과 시설물과 그 그림자만 있었다. 걸을 때 귀찮을 정도로 많던 보행자가 지우개로 지운 듯 사라졌다. 그 풍경이 얼마나 비현실적이었으면 오래전 화집에서 본 초현실주의 화가 키리코를 떠올렸을까. 잠시 후 그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말했다. “일단··· 전시를 미루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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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스마일링 백남준>한지에 유성 잉크 40×40cm 2020
개인전을 무기한 뒤로 미룬 후, 작업실 한쪽에 쌓여 대책 없이 기다리고 있는 작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러자 일생 지겹도록 되풀이해온 그 질문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왜 미술이라는 것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 지금 나는 이 ‘늙은 몸’을 이끌고 뒤늦게 작업을 해보겠다고 이리저리 뛰고 있는 걸까? 허명을 드높이려고? 돈 벌려고? 솔직히 그런 욕심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뭣 때문에 시간이며 체력이며 내 돈까지 퍼부어가면서 무언가를 만들고 보여주려 하는 것일까? 아직도 왜 나는 ‘바람난 재수생처럼’ 평범한 삶의 우선순위를 잊은 채 이 작품 저 작품에 두서없이 손을 대고, 그러면서도 혼자 들떠 나름의 희로애락을 느끼며 몰입하는 것일까? 이 무슨 철없는 짓인가?
이런 답 없는 질문을 하다 나는 또다시 판화작품 몇 점을 가지고 거리로 나섰다. 그동안 나는 판화 같은 새로운 평면작품을 만들 때면 그걸 내 작업실 근처 작은 굴다리에 갖고 나가 맨 먼저 그 벽면에 붙여보곤 했다. 내게 그곳은 새로운 작품을 실험하는 곳이었고, 객관적으로 작품의 효과를 바라볼 수 있는 장소였다. 그래서 거기엔 지난 수년 동안의 내 작업이 아직도 온전히, 혹은 찢어지거나 지워진 채 남아 있었다. 2년 이상을 잘 버티고 있는 작품도 만날 수 있다. 내 작품이 2년 이상 벽에 붙어 관중의 눈을 끌 수 있다니. 그건 나에게 기쁨이자 영광이었다. 언제부턴가 그곳은 내 여러 작품이 내걸린 나만의 미술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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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의 판화 연작.
개인전을 기다리면서 나는 여러 판화작품을 들고 신촌, 광화문, 인사동 근처 거리의 벽에 붙이고 다녔다. 새삼 실내에서만 내 작품을 보이는 일이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코로나19 이전부터 거리에 작품을 벽보처럼 내걸고 다녔다. 대학에 있을 때 나는 소위 ‘대학가’라는 길거리가 지성과 인문학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은 채, 온갖 싸구려 광고로 뒤덮여 있는 것에 심각한 불만을 느꼈다.
그러저러한 이유로 내가 거리미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됐지만, 직접 거리에서 작업하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였다. 태안 앞바다에 기름 유출 사건이 터졌을 때다. 그 일대 바다로 생업을 이어가던 어민이나 어장 관계자, 숙박업자 등은 폭탄을 맞은 듯 일순간에 삶을 잃었는데, 그 원인 제공자들은 보험금을 따지고 있을 뿐 아무런 조처도 하지 않았다. 그 즈음 나는 한 어민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 다음날 컴컴한 이른 새벽 나는 전봉준의 얼굴과 ‘삼성중공업은 서해를 살려내라’라고 쓰인 스텐실을 들고 나가 거리에 뿌렸다. 그리고 이후 나는 시인 김수영의 초상 목판화를 거리에 붙이고 다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는 나와 내 이웃의 삶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인물의 초상들을 목판화로 찍는 중이다. 그분들의 존재와 생각을 잊지 않고 함께 나누자는 취지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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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호 <푸른 김수영> 옵셋 인쇄 69×49cm 2019
지금 우린 고통스럽지만, 코로나19는 언젠가 극복되리라 믿는다. 인류가 이제까지 수많은 역병을 이기고 여기까지 온 것처럼. 오히려 인류에겐 코로나19보다도 현재 문명이 초래하고 있는 환경 문제가 훨씬 심각하게 다가올 것이다. 작가란 본질적으로 자기의 생각을 밖으로 표현하는 존재다. 작품으로 공감과 소통을 나누려는 원초적 목적에는 작품의 형식이나 내걸린 장소 등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코로나19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예술은 사람 간의 공감과 소통을 위하여 형식과 장소를 계속 확장해 나갈 것이다. 내 작업의 거리 진출도 그런 뜻을 지닌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