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한 줌, 미술 두 줌
2021 / 02 / 14
ACC 레지던시, 결과전 <바이오필리아> / 최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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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연, 노다 세자르, 최화준, 배정식 <색동 정원과 33개의 요술봉> 인터랙티브 AR, 모션 캡처, 사운드 2020
회색 빌딩 숲과 인공 정원을 거닐며 온전한 자연을 그리워하는 도시민들. 주말이면 차를 몰고 교외로 나가고 집 안에 식물을 들여 잠깐이라도 초록 생명과 함께하고자 한다. 과학적으로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인간 본연의 특성은 분명 존재한다. 생물학적 용어로는 ‘바이오필리아(biophilia)’. 자연을 좋아하는 생명체의 본질적이고 유전적인 소양을 의미한다.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이 운영, 2016년 시작해 올해로 5회째를 맞이한 ACC_R 레지던시는 667명의 예술창작과 실험을 지원해왔다. 이번 레지던시는 아시아문화연구자, 공연예술가, 아트&테크놀로지 기반 창작자, 학술연구자, 그래픽디자이너와 아티스트 60명이 총집합했다. 이 중 바이오필리아를 중심으로 선발된 22명의 레지던시 결과를 <바이오필리아: 흙 한 줌의 우주>(2020. 11. 24~3. 1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로 엮었다. 전시는 디자인(5명)과 크리에이터스(12명/6팀) 부문의 쇼케이스, 다이얼로그(5명) 연구자의 아카이브로 구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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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나영 <Godspeed You> 디지털 프린트 2020
먼저 문화상품, 인테리어 등 다양한 활용이 기대되는 디자인 섹션을 살펴보자. 김보배는 <플라스티코스모스>에서 해양 폐기물 플라스틱에 기생해 살아가는 바다 생물과 위생을 위해 사용한 세제의 미세 플라스틱으로 오염된 생태계의 아이러니를 아코디언 모양의 책과 부표 작업으로 지적한다. 생명이 피어나고 지는 이미지에 집중하는 최지이는 <피지올로구스의 미로>에서 얇은 세필이 떠오르는 벽화와 바닥에 설치한 LED 조명으로 공간을 채웠다. 알쏭달쏭한 작품 제목은 ‘자연에 박식한 자’라는 의미. 중세 베스트셀러 백과사전에서 차용했다. 박고은의 <식물의 몸짓>은 단풍나무의 움직임을 데이터화한다. 식물은 동물과 다르게 그 움직임을 인간의 눈으로 금방 포착하기 쉽지 않다. 작가는 인간이 그동안 놓쳤던 미세한 식물의 움직임을 데이터로 분석해 카펫, 북엔드 등의 굿즈로 제작한다. 용세라의 <마이크로스코피>는 죽음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한 생명의 신비와 경의를 자연에서 추출한 색과 반복되는 레이어로 표현한다.
크리에이터스 섹션은 ACC 내 ‘창제작 ACT 스튜디오’의 제작 인프라를 활용했다. 국내외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과학, 공학 등 다방면의 전문가가 협업해 참신한 기획을 선보였다. 프리드리히 니체에 매료된 닥드정은 그의 저서 『권력에의 의지』(1901)를 오마주한 <중력에의 의지>를 발표했다. 100㎡로 펼쳐진 천과 실이 상하로 움직여 낙차를 만들고, 금색 구슬이 뭉치고 부딪히는 과정은 현대 사회의 권력 구조와 욕망을 은유한다. 윤미연, 노다 세자르, 최화준, 배정식이 협업한 <색동 정원과 33개의 요술봉>은 인터랙티브 증강 현실 게임이다. 조선의 문신 고산 윤선도가 낙향해 지은 세연정의 자연 요소를 33개 색동 요술봉으로 형상화했다. 관객이 태블릿 PC의 어플리케이션을 활용해 원하는 선택하면 그와 관련된 요술봉에 색이 칠해지고, 연이어 작가가 작성해놓은 희망의 메시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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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영, 이지원 <어드메> 메탈 지오데식 돔 구조물, 20.2채널 반구형 입체음향 시스템, DNA 기반 생성 음악, LED 무빙 조명 2020
이번 레지던시에서 처음 시도된 다이얼로그에는 김소이, 김순웅, 나여랑, 이윤경, 전재우가 참여했다. 환경을 중심 주제로 삼아 페미니즘, 건축, 예술, 장례 문화 등을 연구했다. 기후 위기와 생태계 변화, 종 다양성 등 인간의 활동 반경이 넓고 깊어지면서 생태계 순환에 점점 더 깊숙이 개입하는 오늘날, 각 연구자의 독창적인 시선으로 인류가 새겨 놓은 치명적인 흔적에 주목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생명 사랑을 향한 방안을 모색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경구가 유행하며 인간의 쾌락과 향유 욕구는 점차 커졌다. 그러는 사이 지구 정 반대편의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환경 문제는 지역, 사회, 문화의 국경을 뛰어넘어 전 지구적 차원의 심각한 위기가 됐다. 2020 ACC_R 레지던시는 22명의 집단 지성으로 인류와 자연이 하나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우고, 나아가 공생의 틀을 찾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