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 지능, 인간 해방의 가능성?
2021 / 03 / 17
윤리와 미학의 줄다리기에서 테크놀로지의 역할을 묻는다 / 권 태 현

이은희 개인전 <디딤기와 흔듦기> 전경 2021 더레퍼런스
인공 지능 챗봇 이루다를 둘러싼 논쟁, <올해의 작가상 2020>에서 정윤석의 작업에 등장한 섹스돌 이미지와 그에 대한 비판, 그리고 같은 시기 전시된 이은희의 작업, 거기에 김초엽과 김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 출간까지. 얼핏 보면 쉽게 연결되지 않는 일련의 사건이 거의 동시에 펼쳐지며 인간과 사물, 그리고 이미지에 대한 별자리를 복잡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간과 사물이 교차되는 문제는 이미 관념적인 논의나 전망의 차원을 넘어 당장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윤리적 차원에서도 테크놀로지의 관점에서도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담론의 장을 딛고 같은 방식으로 말을 더 얹기보다는, 이미지의 문제에 집중하여 연속된 시간들을 돌아본다.
이루다는 특정한 이미지로 재현된 인공 지능 챗봇이었다. 애교 섞인 말투를 쓰고 아이돌 그룹을 좋아하는 20대 여성. 그 설정에 높은 수준의 인공 지능 채팅이 탑재되니 이루다는 쉽게 성적으로 대상화되고 소비되었다. 이루다와 성적인 대화를 이어가는 방법이 게임 공략처럼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뒤따라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루다에 대한 비판에 이의를 가진 사람들의 논리는, 이루다보다 먼저 서비스되던 젠더리스 챗봇 심심이에게도 욕설을 하고 성희롱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왜 이루다만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젠더 역학으로 볼 필요 없이, 인공 지능은 단지 기계이기 때문에 성희롱 같은 관념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기계이고 사물일 뿐이다. 법리적으로 성희롱 죄가 성립될 일도 전혀 없다. 그렇다면 아무 문제없는 것인가.

정윤석 <내일> 영상 스틸 2020
이 맥락에서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킨 정윤석의 <내일>에는 섹스돌이 등장한다. 혹자는 섹스돌이라는 소재 자체를 문제 삼기도 했고, 그 사물이 포르노그라피적으로 담긴 숏에 대한 구체적인 비평이 오가기도 하였다. 물론 윤리적인 차원으로 모든 논의를 수렴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만, 비판의 여론이 이토록 거센 이유를 짚어 볼 필요는 있다. 먼저 섹스돌이 사물화된 여성의 표상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최근 섹스돌의 적법성 문제가 사회적 화두이기도 하다. 또한 인터넷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비판 담론의 배경에서 얼마 전 벌어졌던 집단 디지털 성착취의 문제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간 극단적인 여성 대상화가 만연했기 때문에, 문제적 감수성이 공유되는 것이다. 따라서 섹스돌에 대한 반감은 특정 페미니스트 그룹의 문제 제기로 치부해버릴 수 없다. 하지만, 역시나 윤리의 차원으로 모든 미학적 논의 가능성을 일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작가의 성취를 떠나, 사물이 여성의 신체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인간의 이미지와 그 존재론에 대한 질문이 뒤따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쉽게 오르내리는 이슈 저 밑바닥에서 인간의 범주 자체가 근본적인 질문으로 솟아오른다.
때마침 여기 펼쳐진 별자리의 또 다른 한쪽에는 장애의 문제로 정상 인간의 범주와 과학 기술과의 관계를 묻는 작업들이 빛나고 있다. 이은희는 <디딤기와 흔듦기>에서 재활 치료를 위해 기계와 함께 움직이는 신체 이미지를 제시한다. 노동할 수 없는 몸은 다시 노동할 수 있는 몸으로 돌아가기 위해 재활의 분투를 한다. 온갖 기계를 통해서. 회복을 향한 기술은 모두 정상성을 향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재활은 사실 비장애,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향해 힘을 다해 한 걸음씩 다시 발을 내딛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그 체제에서 장애는 정상 인간의 이미지 바깥에 놓여 있다. 보청기와 휠체어를 신체 일부로 삼는 김초엽과 김원영은 『사이보그가 되다』라는 책을 엮었다. 그들은 기술을 통한 신체 증강으로 장애가 완전히 극복될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지향의 맹점을 짚어낸다. 기술이 제시하는 전망은 장애를 그대로 가지고서도 편히 살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문자로 소통하는 기술로 더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음에도, 과학 기술은 소리를 들려주는 기술적 스펙터클을 만들어 장애를 극단적으로 대상화한다. 장애가 있는 상태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사계절, 2021
장애가 있는 신체와 그 이미지의 문제는 장애 자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지만, 무엇이 장애로 인식되는지, 그렇다면 비장애는 어떻게 보이고, 나아가 인간의 형상이란 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된다. 이러한 문제는 위에서 살펴본 사물과 인간이 겹치며 발생하는 문제와도 맞물린다. 우리의 신체는 이미 일정 수준 사물과 관계하고 있다. 장애가 있는 몸에서는 더 극적인 이미지로 드러나겠지만, 꼭 신체에 결합된 장치가 있어야만 사이보그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도구가 우리의 신체와 정신까지 증강하고 있다.앞으로 지금의 편협한 인공 지능을 넘어 보편적 인공 지능으로, 나아가 안드로이드와 결합한 인공 지능이 출현한다면 우리는 사물과 인간의 경계가 완전히 흐려진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할 것이다.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문제를 사이보그 페미니즘과 같은 전통에 비추어 보면, 생물학적 한계와 이분법을 철폐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겠지만, 테크놀로지는 무궁무진한 해방의 가능성인 동시에 항상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의 연결 속에서 이미 도래한 미래를 발견하는 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