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땡이’ 호박은 트라우마
쿠사마 야요이 다큐멘터리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개봉 / 조현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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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포스터
일본 출신의 전설적 예술가 쿠사마 야요이. 거대한 호박 형상의 조각을 뒤덮은 ‘땡땡이’ 무늬는 그의 시그니처다. 그는 이미 뉴욕현대미술관(1998), 퐁피두센터(2011), 테이트모던(2012) 등에서 회고전을 가지며 미술사적으로 연구되고 있다. 2004년 모리미술관 개인전 <KUSAMATRIX>가 무려 52만 명의 관람객을 유치하는 등 대중의 사랑마저 독차지한 작가다. 마켓에서 성과도 독보적이다. 동시대 여성 미술가 중 역대 경매가 1위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5월 19일,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2018)가 국내 개봉했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는 총 77분의 러닝 타임에 야요이의 작업 과정 및 큐레이터와 연구자, 동료 작가의 인터뷰를 담았다. 감독 헤더 렌즈는 “성 차별과 인종 차별, 정신 질환을 극복하고 예술가의 꿈을 쫓아온 한 개척자의 이야기”라고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는 “창작자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것은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도박이다”라는 야요이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어 영롱히 반짝이는 <무한의 방> 전경을 비추며, “전 생명과 자연을 모두 우주 속의 물방울로 바꾸고, 그 생명이 사랑과 함께 날아오르는 거죠”라는 작가의 내레이션을 들려준다. 1929년 마쓰모토시에서 태어난 야요이는 10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다. 야요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못마땅해 했던 그의 어머니는 그림을 뺏어갔는데, 이때의 공포와 히스테리가 그의 맹렬한 작업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트라우마’는 그가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작가 활동을 시작한 야요이는 어느 날, 조지아 오키프의 회화 <검은 붓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길로 예술가로서 삶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편지와 자신의 수채화 작품을 동봉해 오키프에게 부쳤다.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첫 개인전은 작가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단 한 사람의 관객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키프의 답장을 받았다. 미국으로 건너와 당당히 활동해보라는 권유였다. 1958년 야요이는 2,000여 점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새롭게 출발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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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스틸컷
그가 선택한 곳은 뉴욕. 혈혈단신으로 세계 최고의 미술계 문을 두드렸다. 갤러리 입성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반복 행위로 캔버스를 빼곡이 채우던 야요이. 결국 강박 신경증 진단을 받는다. 돌출된 사물에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는데, 이는 어릴 적 아버지의 외도를 목격한 그의 남근과 섹스에 대한 트라우마였다. 1963년 6월, 야요이는 그린갤러리의 그룹전에 클래스 올덴버그, 도널드 저드, 앤디 워홀 등과 함께 참여한다. 남근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야요이의 천 조각 <남근 의자>가 단연 돋보였다. 3개월 뒤 야요이는 올덴버그의 개인전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단단한 재료만 썼던 올덴보그가 천을 재봉한 작품을 선보인 것이다. 뿐만 아니다. 야요이는 같은 해 12월 거트루드스타인갤러리 개인전 <집적: 1,000척의 배>에서 바닥과 벽면 전체를 전시 포스터로 뒤덮었다. 이를 극찬했던 앤디 워홀은 얼마 후 소머리 실크스크린을 벽면에 도배했다. <무한 거울방>의 아이디어마저 루카스 사마라스에게 뺏겼다. 끝없는 우울에 빠진 그는 결국 자살을 시도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야요이는 베니스비엔날레에 무단으로 작품을 설치하고, MoMA 조각 정원에서 누드 해프닝을 벌이는 등 전위적 작업을 이어간다. 그러나 뉴욕 미술계에서 그는 언제까지나 이방인이었다. 여성이고 아시아인이었기 때문이다. 1973년 다시 도쿄로 돌아왔지만, 고국은 여전히 배타적이었다. 또 다시 자살을 시도했다가,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던 그를 주목한 큐레이터가 나타났다. 1989년 알렉산드라 먼로는 뉴욕 국제현대예술센터에서 그의 회고전을 연다. 이후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에서 개인전을 선보이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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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스틸컷
야요이에게 각인된 트라우마는 그를 세상과 등지게 했지만,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는 계기였다. 자신의 심리를 무한히 증식하는 원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드넓은 우주적 공간으로 펼쳐낸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자, 영화의 결말이 궁금한가? 야요이의 삶과 예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빨갛게 물들인 ‘똑단발’ 가발을 쓴 채, 지금 이 순간에도 ‘땡땡이’ 무늬를 그리고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