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Look] 고경호
Koh Kyungho: ‘고추’의 성장기, 나는 어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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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난 사라진> 캔버스에 유채 97×97cm 2019
화가 고경호는 어릴 적 만화가를 꿈꿨다. 아랫집 누나가 그린 공주 그림이 너무 예뻤다. 또 동네 만화방엔 그를 귀여워하던 형, 누나들이 많아 자연스럽게 자주 드나들며 만화책을 가까이했다. 어느 날 그는 할머니와 함께 장난감 가게에 갔다. 할머니는 갖고 싶은 장난감을 고르라고 했고, 세일러문 요술봉을 골랐다. 그는 크게 혼났다. 아마 ‘어디 사내 녀석이 그런 걸 갖고 노느냐’ 정도의 꾸지람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가 숱하게 겪어왔을, ‘사회적 포지셔닝’을 둘러싼 최초의 경험이지 않을까. 이러한 고민은 그가 꾸준히 제작 중인 연작 <허튼 초상>에서 잘 드러난다. 빠르고 강한 붓질로 이목구비를 짓이긴 얼굴에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조차도 잘 모르는” 막막한 심경을 담았다. 서울대학교미술관의 기획전 <밤을 넘는 아이들>(1. 13~3. 13)에 고경호는 <아들 포지셔닝> 연작을 선보였다. 전시의 주제는 아동과 여성을 향한 가정 폭력인데, 그는 ‘아들’로서의 역할과 수행, 괴리감을 가정 폭력의 범주로 포섭한다. 작가는 자신의 유년기 모습이 담긴 사진을 토대로 그림을 그렸다. 백일과 첫돌, 가족, 졸업식, 이발소나 눈 내린 골목, 교회 앞 등 평범한 장소에서 찍은 사진 등 누군가의 아들로서 자라난 그의 30여 년을,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 나고 자란 수많은 남성의 성장기를 상상케 한다. 여전히 아이에서 소년, 성인이 되어가는 이들의 얼굴은 뭉개져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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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정물(요술봉)> 캔버스에 유채 40.5×60.6cm 2019
한편 고경호는 스스로 “회화 덕후”라 칭할 만큼 자신의 회화론을 고민해 나가고 있다. “정체성에 관한 주제를 확장하면서도, 내가 쥔 붓이 캔버스 표면에 가닿을 때의 감각에 집중한다. ‘한 작품이 완성됐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에도 더욱 신중해졌다. 그래서인지 부쩍 그림을 마냥 바라만 보고 있는 시간이 늘었다.” 작가는 농구공과 축구공, 바나나와 소시지 등 정물에 젠더의 맥락을 덧댄 연작 <긴 정물>(그 ‘요술봉’도 그렸다)과 <둥근 정물>에 ‘바니타스’를 접목한 신작을 그리고 있다. 고경호는 말한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회화는 감각의 통로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이전 그림이 비밀스러운 일기장 같았다면, 이젠 내 감정과 감각을 화면에 치밀하게 구축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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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캔버스에 유채 65.1×45.5cm 2019
고경호 / 1990년생. 인하대 미술과 및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전문사 졸업. 교보문고 합정(2020)에서 개인전 개최. <그림자 꿰매기>(SeMA창고 2021), <Dummy!>(갤러리175 2020), <그림이 크기 때문이다>(아트딜라이트 2019), <A Matter of Awareness>(2/W 2017) 등 단체전 참여. 현재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작품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