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미술계‘리더’,책을보라

2022/02/09

2021 아트씬이 사랑한 베스트셀러 10 모아 읽기 / 임 경 용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bbdca79a96f13dfc8584efaf7166a9eb315b9994-500x500.jpg

엄유정,안소연,『Feuilles』,미디어버스, 2021

2021년 예술출판의 풍경은 다채로웠다. 크고 무겁고 화보가 많은 아트북이나 텍스트가 잔뜩 있는 두꺼운 이론서, 전시 도록, 귀여운 일러스트가 있는 책이 예술출판의 전부라고 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미술관이나 갤러리, 기관도 출판 시장에 뛰어들었고, 지난 몇 년 동안 작가나 기획자, 콜렉티브 등은 지자체나 정부가 운영하는 공공 기금이나 텀블벅 같은 클라우드 펀딩, 그것도 아니면 사비를 들여 책을 만들고 유통하고 있다. 무엇보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서울시립미술관, 몇몇 사립 미술관이 예술 전문 서점을 만들고 자체적으로 예술출판물을 유통하기 시작한 것은 예술출판 생태계를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여러 주체와 주제, 형식과 내용이 현실과 얽혀서 만들어내는 작은 세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 나열된 책은 2021년 더북소사이어티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거나 배포된 20권의 책 가운데 10권을 추린 것이다. 이들은 아티스트 라이팅이나 아티스트 리서치, 색다른 형식의 도록, 디자이너 출판, 책에 대한 책, 진(zine), 심지어 무료로 배포하는 비매품까지,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다양하다. 이들을 최근 예술출판의 흐름에서 생각해 볼만한 몇 가지 맥락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60e0032355af810578922e6f47b1ac5ae9191db4-500x410.jpg

신해옥5명,『개별꽃』,화원,2021

2009년 『아트포럼』이 그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한 레자 네가레스타니의 『사이클로노피디아』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예술출판물로 분류하긴 어렵지만 창작자에게 많은 영감을 준 책이다. 사실 2021년 더북소사이어티에서 꾸준하게 판매된 책의 상당수는 예술가의 글쓰기, 즉 아티스트 라이팅을 다룬 출판물이었다. 아티스트 라이팅은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와 다르게 텍스트가 작업의 단위가 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에세이부터 비평, 선언문, 소설, 철학서 등 다양한 형식으로 출판된다. 히토 슈타이얼이 쓴 『면세 미술』이나 세스 프라이스의 『세스 프라이스 개새끼』, 국내에선 김영글의 『모나미 153 연대기』, 김아영의 『제페트, 공중정원, 고래기름, 쉘』과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최하늘 『로버스트 제어/벤타블랙』 등이 작업과는 별개로 종이와 글을 재료 삼아 자신의 활동을 연장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작은 책’을 하나의 경향으로 이해하고 여기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최근 예술출판 기획이나 편집에서 독자에게 부담없이 읽힐 작은 책이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작은 책은 물리적인 조건에 대한 것은 아니다. A6 사이즈는 충분히 작지만 A3와 같은 큰 책도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작은 책’은 온라인 환경에 대한 종이책의 어떤 반응에 가깝다. 온라인은 빠른 속도로 시의성 있는 주제의 정보와 지식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반면 종이 출판은 길게는 수년에서 짧게는 몇 달에 걸쳐 기획과 편집, 디자인과 제작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하지만 작은 책은 비교적 적은 노력과 비용으로 책을 ‘출판’할 수 있는데, 그 덕분에 책이 되기에는 사소하거나 우리가 평소에 간과하는 내용도 책의 형태로 유통할 수 있게 되었다.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059e00027fa6ffba2dd53a6e6dfc9305dc1801bb-500x357.jpg

민구홍, 『새로운질서』,미디어버스,2019

민구홍의 『새로운 질서』는 미디어버스에서 2017년부터 출간한 한시간총서의 다섯 번째 책이다. 한시간총서는 100페이지 내외의 A6 사이즈로 만든 작은 책 시리즈이다. 원고지 100매 정도의 짧은 원고를 출판하는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사실 이 정도 분량의 원고를 일반 단행본으로 펴내긴 어렵다. 또한 무료 배포되었던 『디어 체셔 캣』은 아티스트 리서치를 주제로 작가가 기획한 출판물이다. 경기문화재단의 공공 기금으로 제작되어서 판매할 수는 없었지만 시의성 있는 주제를 작고 간결한 형식으로 출판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책의 아름다움’은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재작년부터 매년 서울국제도서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을 10권씩 선정하고 있다. 아직 초기 단계이고 심사 위원에 따라 조금씩 기준이 변하기도 하지만, 책에 대한 감각을 확장하고 제안하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선정된 10권의 책은 독일 북아트재단에서 주관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공모전에도 출품되는데, 2021년에는 엄유정 작가의 『Feuilles』가 1등상에 해당하는 ‘골든레터’를 수상하기도 했다. 이 책은 엄유정 작가의 식물 드로잉을 책 형식으로 충실하게 번역한 사례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함께 수상을 했던 김뉘연의 『모눈 지우개』 역시 서점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4101f6aa0c0c24f4faed3a7126e33078534b51be-500x829.jpg

김뉘연,『모눈지우개』,외밀,2020

디자이너가 출판 주체가 되는 것은 최근 꾸준히 이어져 온 현상이지만 2021년엔 유독 그러한 책을 많이 찾아볼 수 있었다. 『개별꽃』은 그래픽디자이너인 신해옥이 취미가에서 진행했던 동명의 전시 결과물로, 여러 협업자가 쓴 글로 구성되었다. 디자이너 최성민이 쓴 『재료: 언어―김뉘연과 전용완의 문학과 비문학』은 앞에서 언급했던 『모눈 지우개』를 쓰고 만든 김뉘연, 전용완과의 인터뷰를 수록했다. 워크룸과 슬기와 민이 함께 설립한 작업실유령의 창작 평론 프로젝트 첫 번째 결과물인 이 책에서 저자는 작가와의 인터뷰를 재료로 작업에 대한 비평적 관점을 제안한다. 사실 이 책이 디자이너 출판의 새로운 전형으로 이해?는 것은 책을 만드는 디자이너와 편집자와의 대화로 (혹은 그것을 통해) 책이 구축됐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재료: 언어』는 김뉘연, 전용완이라는 작가에 관한 책이지만 동시에 책의 조건을 드러내는 ‘책에 대한 책’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통 일반적인 출판 시장에서 ‘책에 대한 책’은 책을 읽거나 만드는 행위와 관련한 내용이 많다. 출판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의 호기심을 충족해 주는 책인데, 반면 우리는 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폭로하며 책에 대한 환상이나 통념을 무너뜨리는 책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아나소피 스프링어와 에티엔 튀르팽이 엮은 『도서관 환상들』은 도서관에 대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도서관은 우리가 상상하는 인류 지식의 보고이자 책을 매개로 사람들이 서로 만나고 소통하는 이상적인 공간은 아닌 듯싶다. 대신 이 책은 제도화되고 이상화된 도서관에 대한 다른 상상이나 실천을 제시하며 책 공간으로서 도서관의 가능성을 확장한다.

https://cdn.sanity.io/images/m65sjp4q/production/07b45f1c77d644e04a18fde91187d6eadc18526a-500x401.jpg

마이클스노우,『CovertoCover』,프라이머리인포메이션,2020

‘책에 대한 책’은 책에 대한 비평적 관점도 포함할 수 있다. <파장>으로 유명한 영상작가인 마이클 스노우가 1975년에 노바스코샤예술디자인대학의 의뢰로 만든 『Cover to Cover』는 책에 대한 그 어떤 책보다 책의 구조를 잘 드러내는 책이다. 책이 시작되고 끝나는 앞표지와 뒤표지에 실린 두 개의 문 사이 공간이 책의 페이지를 통해 보인다. 독자는 이를 통해 책 페이지가 실제 공간과 같은 물리적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특히 이 책은 오랫동안 절판되었다가 2020년에 프라이머리인포메이션을 통해 복간되었는데, 복간은 과거에 존재했던 책을 다시 현재화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높은 가격에 거래되던 책을 현실화한다는 측면에서 아티스트 북의 활성화에 기여한다.
『책을 만드는 새로운 예술』은 멕시코 출신의 개념미술가 율리시스 카리온의 대표적인 글 두 편과 그의 동료인 기 스크라에넨이 카리온에 대해 쓴 글을 번역한 책이다. 여기에 실린 「책을 만드는 새로운 예술」(1975)에서 카리온은 책을 만드는 것이 영화 만들기나 미술 만들기 같은 다른 창작 행위와 어떤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독자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그는 그것이 가능하려면 말 그대로 책을 만드는 것이 새로운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질문을 따라가며 이렇게 질문해 보자. 책을 만든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어떠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2017년부터 2021년까지 발행된 여기 10권의 책은 각자 자신의 조건에서 새로운 책 만들기를 시도한 결과물이다. 사실 그것을 하나의 책으로만 인식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사물로서 제시되지만 책을 만들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맺는 수많은 잠재적 관계를 내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고 인식할 수 있는 세계를 확장하고 그것에 깊이를 더해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나자와21세기미술관(2024.11.01~)
[만료]고흥군청(2024.11.01~2025.01.08)
[만료]한솔제지(2024.11.13~2025.01.08)
아트프라이스(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