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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포도뮤지엄 개관전 <너와 내가 만든 세상> / 김해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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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뮤지엄 외관
제주도는 잘 구운 계란프라이를 닮았다. 숭숭 구멍 난 현무암 해안이 프라이의 바삭거리는 가장자리라면, 섬 중앙에 봉긋이 솟은 한라산은 터질 듯 터지지 않는 긴장감으로 사람을 홀리는 노른자다. 북적이는 인파의 바닷가를 뒤로하고 한라산 안자락으로 가면 갈수록 인적은 줄어들고 사방은 고요해진다. 제주에서 서귀포로 넘어가는 한라산 서쪽 내륙 도로 한편, 노른자와 흰자의 경계선 즈음에 현대미술관이 하나 들어섰다. 포도뮤지엄은 2021년 4월 오픈해 이제 갓 한 살이 된 제주도 ‘신생 미술관’이다. 오름을 등지고 멀리 바다를 내다보는 조용한 중간 산 지대에 둥지를 틀었다. 한데 ‘포도’라는 네이밍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재일 한국인 건축가이자 자연주의 건축으로 유명한 이타미 준이 제주의 자연 풍경에서 영감을 받아 포도송이 모양으로 지은 ‘포도호텔’에서 따온 이름이다.
포도뮤지엄은 개관을 맞아 기획전 <너와 내가 만든 세상>(2021. 4. 24~5. 23)을 준비했다. 강애란, 권용주, 성립, 이용백, 장샤오강, 진기종, 최수진, 쿠와쿠보 료타 등 한중일 현대미술가 8인의 작품을 한데 모았다. <너와 내가 만든 세상>은 비뚤어진 욕망이 만들어내는 혐오의 해악성을 주제로 한다. ‘균열의 시작’, ‘왜곡의 심연’, ‘혐오의 파편’ 세 섹션으로 이어지는 구성으로, 한국 사회를 곪게 하는 ‘혐오 바이러스’를 전면에 드러낸다. 한편 포도뮤지엄 기획전의 특징은 ‘테마 공간’이다. 관객이 전시의 주제에 몰입하도록 돕는 연출된 공간이 전시 중간중간에 자리하고 있다. 자, 그럼 전시장의 입구부터 걸어 들어가듯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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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주 <매달린 사람들> 마네킨, 스티로폼, 우레탄폼 외 혼합재료 가변크기 2020
어두컴컴한 입구에 핑크 플로이드의 <Us and Them>이 울려 퍼진다. 벽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아치형 동굴이 뚫려있다. 그 안에는 수십, 수백 마리쯤 되는 듯한 붉은 앵무새가 늘어서 있다. 이들은 “너 그 얘기, 들었어?”라며 소곤소곤 속삭이는 듯하다. 새들의 수군거림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기면 빛이 새어 나오는 동그란 구멍이 듬성듬성 뚫린 복도가 나온다. 멀리서 보면 밤하늘의 별자리 같기도 한 작은 틈에 눈을 가져다 대면 그 안에는 ‘그들이 우리를 죽이려고 병균을 만들었대’ ‘그 사람들은 모를 테니 피해를 주는 건 아니야’ 등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찝찝한 글귀와 마주친다. 각 구멍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반복적으로 등장해 온 온갖 ‘낭설’로 가득 차있다. 뜬소문은 한 명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뿐이지만, 그 터무니없는 말들이 모여 사회는 불안에 빠지고 사람들은 서로를 의심한다. 심지어 누군가는 구해줄 이 없는 깊은 미궁에 자신을 가두고 목숨을 끊기도 한다. 거울의 반사 효과, 록 밴드의 쩌렁쩌렁한 사운드, 공포스러운 문장으로 구현된 이 극적인 도입부는 본격적인 작품 관람에 앞서 ‘혐오’라는 주제를 환기하는 첫 번째 테마 공간이다.
이후 전시는 이용백의 <브로큰 미러>(2011)와 성립의 <익명의 초상들>(2020) <익명의 장면들>(2012~20) <스치는 익명의 사람들>(2020)로 이어진다. 커다란 거울에 내 모습을 이리저리 비추던 찰나, 굉음과 함께 총알이 날아와 박히고 거울이 산산조각 난다. 거울에 LED 모니터를 덧댄 이용백의 작업은 ‘보이는 걸 곧이곧대로 믿지는 말라’고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성립은 웹 사이트와 앨범에서 수집한 눈, 코, 입을 무작위로 조합해 간결한 선으로 가상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는 작가다. 현대 사회의 익명성을 시각화한 그의 연필 드로잉은 모니터 뒤에 숨어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낸 이가 당신 옆에 버젓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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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백 <브로큰 미러_클래식> 41인치 모니터, 거울, 맥미니, 스테레오 스피커 123×80×6cm 2011
다시 한번 ‘테마 공간’이 등장한다. 관객이 바닥에 비친 문장을 밟으며 벽에 다가가면, 그들의 신체 모양을 본뜬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림자에는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혐오 발언’이 새겨진다. 관객의 직접 참여로 이뤄지는 인터렉티브 기술을 활용해 사회적 소수자가 당해왔을 모욕적인 발언을 피부로 느끼도록 유도한다. 바로 옆에는 ‘패닉 부스’라는 거울 방을 두어 테러, 전쟁, 학살 등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에 관객을 가둔다. 잠시나마 여행의 들뜸을 내려놓고,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직시할 것을 경고한다. 쿠와쿠보 료타는 어두운 공간에서 천천히 움직이는 장난감 기차의 조명으로 일상 사물의 그림자가 무섭도록 커졌다가 이상하리만치 작아지는 상황을 조성했다. <LOST #13>(2020)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세상의 이치를 시각예술로 암시했다.
이번 기획전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섹션. 널찍한 전시 공간에 권용주, 최수진, 장샤오강의 작품이 순서대로 펼쳐진다. 권용주는 소련과 동독의 선전 포스터를 <두 사람>(2020),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2020), <매달린 사람들>(2020)이라는 조각작업으로 재해석했다. 굴뚝으로 변해버린 줄도 모른 채 열심히 걸어 올라가는 인간 군상, 활짝 웃고 있지만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남녀 초상 조각 등으로 사회가 강요한 폭력에 완전히 잠식당한 현대인을 반영한다. 최수진의 <벌레 먹은 숲>(2020)은 ‘○○충’이라는 단어가 유행하는 한국 사회 단면을 벌레가 파먹은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서로를 헐뜯고 갉아먹어 종국엔 나라 전체가 병든 숲이 되어버리기 직전, 이를 치유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되묻는다. 장샤오강의 거대한 설치작업 <기억의 서랍>(2021)에는 제2차 세계대전부터 1960년대를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가족사진, 편지 등 소중한 기록이 담겼다. 거대한 역사 속에 사라져간 소시민의 울고 웃는 기억을 끄집어내며 남을 미워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일궈나가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집중하도록 권한다. 전시의 말미에는 강애란의 <숙고의 방>(2021)과 진기종의 <우리와 그들>(2019)이 놓였다. 자유와 평등을 말하는 책과 공동체성 회복을 기원하는 간절한 손이, 어그러진 사회의 해결책임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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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의 테마 공간 #3
잔혹한 현실도, 희망찬 미래도 실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내가 만드는 것’이다. 불신과 오해를 딛고 화합과 연대로 나아가는 일 또한 우리의 몫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천혜의 관광지에서, 포도뮤지엄은 ‘혐오’를 도마에 올리며 논의의 불씨를 꺼버릴 게 아니라 활활 태워 건강한 세계를 함께 건설하자고 한다. 앞으로 이 ‘솔직한’ 미술관은 또 어떤 행보를 보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