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미술의 어제와 오늘 #1
2012 / 02 / 16
지난 12월 17일 북한의 최고권력자 김정일이 사망했다. 그는 집권 기간 동안 북한미술의 최고 이론가로 군림하며 북한미술의 변화를 주도하기도 했다. 앞으로 북한미술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까. 그 전망에 앞서 artWA에서는 art in culture에서 다루었던 북한미술에 대한 지난 기사를 다시 꺼내어 보며, 과거 북한미술의 변화 양상을 되짚어본다. 첫 번째로 광복 60주년을 맞아 준비한 2005년 9월호의 박계리의 글을 통해 해방 이후 북한미술의 양식적 이념적 토대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조선화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두 번째로는 2007년 10월호의 북한미술 특집 중 김정일 시대의 미술을 이론, 교육, 정책, 해외 교류 등 다각도에서 심층 분석한 하타야마 유스케의 글을 싣는다. 마지막으로 2012년 1월호에 재기고한 하타야마 유스케의 글 <북한미술, 김정일 시대의 결산과 김정은 시대의 전망> 일부를 공개한다.
<<art in culture 2005년 9월호(http://www.artinculture.kr/content/view/128/39/)>>
김정일 시대의 미술론을 말한다
글| 박계리·한국미술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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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한 미술전람회장. 백두산 천지에 서 있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형상화했다.
동일한 뿌리에서 생겨난 두 개의 나무
이러한 조선화의 전형적인 양식이, 북한에서 이야기하듯 김일성에 의해 형성된 것은 물론 아니었으며, 반사대주의 이론 투쟁과 반복고주의 이론 투쟁 단계를 거치는 논쟁 속에서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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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관 <남강 마을의 녀성들> 조선화 121×264cm 1966 조선화는 동양권의 같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사회주의 사실주의 작품들과 다른 독자적인 양식이다.
김일성 우상화 작품과 종파주의 척결
북한에서 김일성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론은 1970년대 이후 ‘당중앙’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의 핵심부에 옹립되기 시작한 김정일의 대두와 함께 변화의 전기를 맞게 된다. 김정일 시대 미술론은 기본적으로 김일성 시대 미술론의 토대 위에 존재한다. 김정일 미술론에 의해 김일성의 형상을 작품화하는 김일성 형상 미술이 전면적으로 실시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김정일 미술론이 주목되는 이유는 현대 북한미술을 이끌고 있는 그의 미술론에 의해 김일성 시대 미술론의 개념이 보다 폭넓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성주의 미술론에서 봉건착취계급의 산물 즉 척결해야 할 대상으로 지목 받았던 수묵화의 여러 준법들이 복권되고 있고, 이를 통해 사의성이 다시 부각되면서 형사(形似)와 사의(寫意) 개념의 재정립을 통한 사실주의 미술의 새로운 개념 정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사회주의적 풍경화에 대한 개념 정의를 새롭게 해내면서 인물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던 풍경화 장르를 적극 육성하는 등 조선화에서 장르와 주제를 다양화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노력들이 시도되고 있다. 이와 같이 해방 이후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 미술계에서는 많은 논쟁이 벌어졌고, 이는 다분히 회화 장르에서만 일어난 현상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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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철 <보천보의 횃불> 캔버스에 유채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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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대 창작사 조각 창작단 <만수대 대기념비 군상-혁명 전통편>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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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대 창작사 조각창작단 <만수대 대기념비 중앙의 김일성 동상> 20m 1972
형사와 사의 개념의 재정립
이에 대해 김정일은 자신의 미술론에서 이러한 풍경화 창작 태도에 대하여 비판을 가하면서 ‘사회주의 풍경화에서는 무엇보다도 뜻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풍경 속에 표피적으로 배어 있는 서정적 자연미보다는 풍경을 통하여 드러나는 작가의 사상성을 중시하는 김정일의 새로운 풍경화관은 사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보다는 전통 문인화론의 관점과 맥락을 같이한다. 전통 사군자화의 경우, 난초와 대나무가 그 외형적 자연미 때문에 애호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포한 강력한 정신성 때문에 애호되었던 점을 상기할 때, 김정일식 관점에 있어서, 풍경화의 존재 의미 역시 이와 동일한 정신성의 범주에서 찾아진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김정일이 강조한 풍경화의 ‘뜻’은 전통 문인화에서 강조되어 온 사의성(寫意性)의 현대적 해석으로 이해된다.
어쨌든 이러한 사의성의 강조는 몰골법(沒骨法)의 복권과 함께 부각되었다. ‘몰골’이란 뼈 즉 윤곽선 없이 그리는 것으로, 흔히 윤곽선을 그리고 그 안을 매꾸어 그리는 구륵전채법과 상반되는 표현기법이다. 한번의 붓질로 대상을 형상화한다고 하여 ‘단붓질법’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기법은, 김정일에 의해 조선화법의 기본 특징으로 정의된 ‘함축’과 ‘집중’을 형상화해내는 데 적합한 기법으로 재조명되면서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서양의 명암법에 의한 입체 표현보다는 김명국의 〈달마도〉에서와 같이 한번의 붓질로 대상의 덩어리감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보다 조선화적인 기법임이 강조되게 되었다.
그러나 몰골법을 조선화 표현의 주된 기법으로 삼고자 하는 김정일의 시도는 당시 북한 미술계에서 받아들이기 쉬운 명제는 아니었다. 몰골법은 전통적으로 문인화의 기본적 화목인 사군자를 그릴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기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인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파악하여 척결해야 할 봉건잔재로 규정하고 있던 북한 미술계에서 문인화의 대표 기법인 몰골법의 수용에 대해 거부감을 보이는 것은 일면 당연한 현상이다. 따라서 몰골법이 주창된 초기인 1970년대에는 몰골법의 사용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김정일의 교시를 거부하지는 못하지만 소극적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논의가 중심에 있었다. 1970년대에는 조선화에서, 주요 부분은 구륵법으로 부차적인 부분은 몰골법으로 그리자는 구륵·몰골배합론이 주류를 이루면서도, 박헌종을 비롯한 이론가들과 몰골법의 소극적 배합론에 반대하는 논자들과의 논쟁이 계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조선화에서 몰골기법 등장
이러한 논쟁을 토대로 1990년대에 들어오면 몰골법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공격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김기훈의 논리에 잘 드러난다. 그는 몰골법도 수묵몰골과 채색몰골로 분리시켜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수묵과 채색의 문제로 한정시키고, 몰골은 이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제외시켜내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몰골기법은 조선화 표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1990년대 말엽에 몰골기법은 몰골형식이라는 단어를 탄생시키며 더욱 폭넓게 사용된다. 결국 김정일의 시도는, ‘몰골법’이라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덜 민감한 용어를 방패삼아 이를 통해 그동안 이데올로기적으로 거부하였던 수묵화의 여러 기법들을 복권하고자 하는 야심찬 전략이라고 판단된다. 이에 따라 〈진격의 나루터〉와 같이 명암법에 의해 대상의 덩어리감을 표현하던 방식은 〈빛나는 우리 조국〉의 선묘에 의한 인체 표현으로 확장되었다. 또한 <죽음을 각오한 사람을 당할자 이 세상에 없다>에서 처럼 광선에 의하여 생긴 복잡한 명암을 보이는 대로 다 그리지 않고 선묘를 통해 명암을 집약화하여 처리하는 몰골화 형식이 발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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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룡권 <진격의 나루터> 조선화 113×218cm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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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만 <강선의 저녁 노을> 117×197cm 1973 자연 소재만을 다루던 풍경화 형식에서 벗어나 사회주의 건설 모습을 결합시켰다. 이 작품은 풍경을 통해 은유로써 노동자의 힘찬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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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석호 <소나무> 253×131cm 1968
김정일 시대에 부활한 리석호
1971년 죽음과 더불어 화단에서 사라졌던 그가 다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 것은, 1988년이다. 김정일에 의한 몰골화 대두와 함께 수묵화의 복권와 발맞춰, 1988년 리석호·우치선의 2인전이 열리고, 1989년 12월에는 평양에서 리석호 개인전이 한달 동안이나 대대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그의 생전에 열린 1957년 개인전과 비교하여 훨씬 큰 규모로 대 성황리에 열렸다. 이제 〈소나무〉보다는 몰골법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더 높은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북한 미술계가 〈들꽃〉과 〈창포〉에서 보듯이 서예적 필묵미와 더불어 사의성이 농후한 그의 작품에 다시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 단계 북한 미술계의 변화는, 김일성 시대의 미술론을 계승함과 동시에 이를 더욱 확장, 심화시켜내었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의 전통 위에 존재하나. ‘함축’과 ‘집중’으로 조선화를 재규정함으로써 서양화와 다른 조선화만의 특징을 보다 부각시켜내고자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80년대 후반부터 보다 본격적으로 대두되고 있는 ‘조선민족제일주의’를 통해 더 활성화되고 있으며, 현재는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와 더불어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북핵 문제로 국제사회 속에서 일촉즉발의 상태를 걷고 있는 북한 사회가 김정일을 중심으로 총대사상를 기치로 선군(先軍)시대를 선포하면서 미술계에서도 선군 미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북한 사회에서 미술의 존재 의의가 선전 선동의 대표적 수단임을 감안한다면, 선군 미술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2000년대 북한 미술계의 상황은 북핵 문제가 국제사회에서 안전하게 해결될 때까지 지속되리라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