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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문화속의현대미술#3(1)

2012/05/08

디지털 문화의 기술적 사회적 예술적 맥락에서 미디어아트를 비롯해 게임, 영화 등 최근 출현한 새로운 문화 형식의 관계에 대해 고찰하는 논고의 마지막 편. 필자는 실험성을 지닌 미디어아트가 고립된 영역에서 시도되거나, 혹은 본래의 태도를 함몰한 채 제도화되고 있는 현실에 문제를 제기한다. 필자에 따르면 하룬 파로키는 현대미술과 현재의 기술 환경을 매개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첨단기술에 대한 체험을 유도함과 동시에 그 체험의 조건을 작품에 불투명하게 노출시키는 그의 방식은 예술 영역에서 개념적으로 디지털 기술의 ‘속도’를 앞질렀던 선구적인 미디어아티스트 제프리 쇼와 비교 가능하다.

하룬 파로키의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s)>
- 미디어아트의 난점과 방향 전환에 관하여 (1)

글|손부경·예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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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Sun with no Shadow> 2채널 비디오, 설치 2010. 4편으로 구성된 <시리어스 게임> 시리즈 중 4편. (Photo: Kunstfort Asperen)

미디어아트의 난점
미디어 이론이나 미학의 관점에서 현대미술과 미디어아트, 대중문화의 형식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보기에 따라 미디어아트 못지않게 디지털 영화나 게임 역시 충분히 미학적인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날의 특정 예술형식이 전통예술로 부터 물려받은 특유의 아우라를 상실하고, 동시에 컴퓨터 게임이 ‘오락’이라는 틀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중요한 문화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술 고유의 역할로 여겨졌던 영역이 이제는 다양한 문화 형식에서 발견되고 있다. 시각문화의 양식과 기술, 두 가지 모두가 산업적으로 전유되고 있는 상황에서 현대미술은 매체 환경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개입하고 있을까.
필자는 지난 글에서 제프리 쇼(Jeffrey Shaw)를 중심으로 디지털 문화에 상응하는 예술형태의 한 모델을 논의한 바 있다. 그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진보적인 경향을 공유하면서도 매체 환경의 변화양상을 적절히 반영해 왔다는 점에서 여타 대중적인 문화 형식과 차별화된다. 즉, 제프리 쇼의 주요 작품은 비판적인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태도와 첨단기술에 대한 지각 습관을 변증법적으로 재매개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미술을 둘러싼 제도적 조건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모델이 지닌 실천적인 한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우선 기술적 문제에 기인한다. 첨단기술이 활용된 미디어아트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많은 비용과 인적자원이 필요한데, 이는 작가 개인이 쉽게 해결할 수 없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러한 작품을 유통할 수 있는 채널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미술시장은 비물질적인 형태로 생산되고 유포되는 성격의 미디어아트를 거래할 수 있는 수단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형태의 작업은 국가나 기업 단위의 지원이나 다양한 전문가들의 협업을 필요로 하는데, 현실적으로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예술가나 기관은 많지 않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첨단기술을 ‘선취하는’ 형태의 미디어아트를 제작하는 일은 극히 달성하기 어려운 과제가 되었으며, 기술적 ‘실험’을 추구해 온 많은 작업들 역시 뉴테크놀로지의 흐름 속에 묻혀 버리기 일수이다. 
이러한 작업들이 점차 특수한 의미의 미디어아트 영역으로 고립되는 동안, 또 다른 형태의 예술이 미디어아트라는 이름으로 대중화되었다. 예컨대 총체예술을 표방한 문화콘텐츠의 스펙터클, 사담으로 가득 찬 싱글채널 비디오의 홍수 같은 현상을 들 수 있는데, 이러한 경향들은 앞서 언급한 어려움을 우회하여 익숙한 예술 개념과 함께 기존의 미술관 시스템, 문화 산업의 요구에 부응하여 안정적으로 제도화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기술을 세련된 표현수단으로서 이용하거나 예술을 첨단기술의 장식적 요소로 삼는 태도 중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전통적인 작가주의와 기술 매체의 어색한 결합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다시 말해 이러한 양상은 곧 예술적 소재와 미학적 담론의 고갈을 전통예술의 아우라와 대중매체에서 차용한 기술적 효과를 이용하여 한시적으로 감추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마주하여 어떤 대안을 논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지금 문제가 되는 기술적 아방가르드, 표현 수단으로서의 기술, 대중예술형식의 유형(각각 가상현실, 비디오 프로젝션, 컴퓨터 게임에 해당하는)이라는 현상들을 어떻게 하면 예술적 맥락에서 효과적으로 재매개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하룬 파로키의 최근 작업들은 제프리 쇼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디지털 시대의 미학적 정치적 쟁점에 관여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룬 파로키의 ‘시리어스 게임’ - 가상현실 시뮬레이터와 현대미술의 재매개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1944~)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실험 영화로 잘 알려져 있지만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있어서도 주목할 만한 작품을 다수 선보인 바 있다. 그는 주로 다큐멘터리 영상과 설치 형식의 작품을 통해 기술적으로 매개된 이미지와 현실이 맺는 특정 관계를 탐구했다. 이를 테면 감시카메라와 저격용 소총의 뷰파인더, 레이더 스크린 등 다양한 층위의 이미지를 제시함으로써 이미지 체험의 현대적 의미, 그리고 그것을 예술적 차원에서 매개하는 문제를 쟁점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파로키는 주로 ‘현대전(modern warfare, 보통 제2차 세계 대전이나 베트남전 이후의 전쟁을 말한다.)’의 양상에 주목했으며, 특히 군사용 첨단기술이 활용되는 모습에서 현대사회를 관통하는 정치적 문화적 의미를 도출해 내고자 했다. 잘 알려져 있듯, 역사적으로 전쟁은 가장 새로운 기술이 구현되는 장소로서 민간 기술의 발전은 상당 부분 전쟁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므로 현대전은 기술의 최전선이자 새로운 기술적 형상이 발견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두드러지는 사실은 다름 아닌 전쟁의 ‘가상화(virtualization)’이다. 과거의 전쟁과 달리 오늘날의 전쟁은 시간과 공간을 포함한 물리적 제약에서 상당부분 벗어나 있다. 예컨대 디지털화된 첨단무기는 컴퓨터 스크린과 인터페이스를 통해 조작되고, 전투의 과정과 결과 역시 스크린상의 정보를 통해 확인된다. 이처럼 현대전의 양상 속에서 레이더 화면은 육안의 이미지에 우선한다. 이것은 곧 현실의 시뮬레이션이 감각적 현실을 광범위하게 대체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실제 전쟁과 전쟁 시뮬레이션(war simulation) 게임의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동안 게임이 전쟁을 모방해 왔다면, 이제는 역으로 전쟁이 게임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다.

<시리어스 게임> 리뷰 영상

같은 맥락에서 파로키의 <시리어스 게임(Serious Games I~IV)>시리즈는 전쟁의 가상화, 그리고 시뮬레이션의 현실적 효과에 대한 흥미로운 쟁점을 제기한다. ‘시리어스 게임’은 일반적으로 훈련, 교육, 치료 등 특별한 목적에 따라 만들어진 일종의 기능성 게임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파로키는 시리어스 게임의 군사적 활용 사례를 일련의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으로 제작하여 비엔날레나 갤러리 등에서 선보이고 있다. 이 작업들은 대체로 멀티채널 비디오의 형태로, 훈련용 가상현실 프로그램이 구현하고 있는 가상현실과 이러한 프로그램에 군인들이 참여하고 있는 상황을 서로 다른 화면을 통해 보여 준다. 이로써 프로그램에 몰입된 사용자의 시점과 그 사용자의 상황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점을 동시에 보여 준다.
<시리어스 게임> 시리즈의 의미 작용은 크게 두 가지 축에 따라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군사용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의 ‘정교함’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영상에 나타나는 가상의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은 그 장소와 지형물이 매우 사실적으로 모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인칭 시점에서 체험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세한 단위의 전술적 움직임의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병사들은 컴퓨터 인터페이스를 이용하여 가상의 전장을 이동하며, 때때로 전차와 같은 이동수단을 조종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호작용은 <콜 오브 듀티(Call of Duty)>나 <배틀필드(Battle Field)> 연작과 같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FPS(일인칭 슈팅)게임’의 형식적 특성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따라서 병사들이 가상환경 내부에서 모의 작전을 수행하는 것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게이머들이 멀티플레이를 하는 상황과 외형과 효과에 있어서 상당히 유사하다. 또한 이러한 형태의 시뮬레이션이 인간의 생사가 걸린 군대에서 활용된다는 사실은 그만큼 시뮬레이션을 이루는 질서의 현실성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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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훈련 시스템(DSTS, Dismounted Soldier Training System)> 2011. 미 육군의 주도로 개발된 가상현실 훈련 시스템으로 독일 크라이텍에서 만든 FPS게임엔진인 '크라이엔진3'를 기반으로 제작됐다. 이전의 대표적 군사용 훈련 시뮬레이터로는 2002년 개발된 <AA(America's Army)>와 2007년 개발된 <VBS2(Virtual Battlespace2)>가 있는데 이 프로그램은 현재 일반인들도 플레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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