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는 몽상하라
일론 머스크는 21세기에 가장 이종 교배적인 인물이다. 그의 사업가적 결정에는 효율성과 몽상이 함께 작용한다. 화성 개발이라는 몽상을 기업 비전에 포함한 게 대표적인 예다. 이 하이브리드 기업인이 우주 탐사를 꿈꾸는 시대에, 비물질적이고 정신적 영역인 몽상은 물질화되고 시각화되었다. 몽상은 이제 가시적으로 측정되어 ‘투입 대비 산출’을 추산하는 경제 구역 안으로 편입되고 있다.
시각 매체의 혁신과 발전은 예술운동의 진로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몽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에릭 홉스봄은 저서 『아방가르드의 쇠퇴와 몰락』(조형교육, 2001)에서 20세기 아방가르드 운동이 실패한 이유로 시각예술에서의 진정한 혁신이 ‘예술 외의 분야’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광고와 영화가 시지각 면에서 대중에게 대담한 혁신을 가져다줬고, 이로써 시각예술은 고립적이고 좁은 입지를 갖게 됐다. 아방가르드 운동은 ‘새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예술’을 표방했으나 현대 소비 사회에 흡수돼 버렸고, 오늘날은 20세기 시각 매체 혁신에 디지털 기술이 더해져 상상과 시각화의 간격이 지극히 얇아지고 있다. 예술가의 몽상과 상상의 입지도 그만큼 줄어들고 있다.
어두운 밤에 불현듯 일어나는 몽상, 낮의 현실을 넘어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몽상,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돌려주는 몽상, 나를 나로서 살게 하는 몽상…. 이들은 이제 한낮 백일몽이다. 몽상에서 불꽃을 일으킨 19세기 낭만주의자는 보편적 계몽주의에 항거하는 함성을 내질렀다. 촛불 앞에서 생각에 잠기곤 하던 실존적 인간은 합리적 이성의 실패를 부르짖었으나, 뒤이은 대중 소비 사회의 물결이 이를 쓸어가 버렸다. 아방가르드 운동이 동력을 잃고 스러지자, 몽상도 희미해져 갔다.
오늘날 몽상이 사라진 자리는 매끈한 해상도의 이미지가 장악하고 있다. 이미지가 지리적 경계 없이 넘나드는 곳에는 효율성의 주파수만이 진동하며 퍼져 나간다. 지금, 우리에게 몽상할 힘이 남아있는가? 만약 우리가 다시 몽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낭만주의자나 실존주의자의 것이 아닌 21세기의 몽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머스크의 이종 교배적 시도에 못지않게 창발적인 몽상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므로 21세기의 예술은 근대에서 벗어나 다른 영역과의 적극적인 접속을 시도해야 한다. 아방가르드의 고립을 벗어나 예술과 대중문화, 과학 기술, 사회, 경제가 이종 교배되어 꾸는 꿈, 즉 예술이 주도권을 갖고 다른 영역과 접속하는 꿈을 펼쳐야 한다.
미국의 문예비평가 스베틀라나 보임은 저서 『오프모던의 건축』(문학과지성사, 2023)에서 1920~30년대 러시아 아방가르드가 다 소진하지 못한 몽상을 찾아내고, 이를 예술의 새로운 길로 제안했다. 그는 블라디미르 타틀린의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1919)에 대해 “철과 유리, 그리고 혁명으로 만들어졌다”라고 비평한 시클롭스키의 말을 인용하면서, 타틀린의 탑에 담긴 시적 몽상을 끄집어냈다. 또한 군사 정찰용 비행체로 의뢰받아 제작했으나 정작 비행에 적합하지 않은 개념미술 작품으로 남은 <레타틀린>(1932)은 기술적 고려보다는 미학적 모험을 보여줌으로써 상상력이 기술을 낯설게 만든 예다. 예술가의 몽상은 세상을 향해 다시 한번 자신의 팔을 크게 펼쳐야 한다. <레타틀린>의 날개처럼,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의 나선형 몸체처럼.
<제24회 송은미술대상전>(2024. 12. 17~2. 22 송은)에서 오묘초는 SF 소설과 접목해 일반적인 인류의 범주를 벗어나 새롭게 자랄 생명의 서사를 조각했다. 유신애는 <Next Painting>(6. 5~7. 20 국제갤러리 서울)전에서 대중문화를 차용한 그림으로 자본주의가 포획할 수 없는 압도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를 상상했다. <유영하는 세계>(4. 17~6. 29 세화미술관)전에 참여한 이빈소연은 ‘페어리 모빌리티’라는 가상 회사를 내세워 근현대 사회에 환영을 중첩하고 이를 풍자했다. 이처럼 생명과 사회, 기업에 대한 새로운 몽상이 기술을 가로질러 갈 때, 기술 발전이 예술에 영감을 불어넣는 선순환이 다시금 일어나지 않을까. 몽상마저 기업가에게 뺏긴 시대, 몽상으로 현실 너머를 꿈꾸는 열정에 더는 불을 지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동시에, 그 의문을 부정하며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