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새바람, 내일의 뮤지엄

제27차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두바이 총회 성료
2025 / 12 / 01

국제박물관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이하 아이콤) 두바이 총회(11. 11~17 두바이월드트레이드센터)가 막을 내렸다. 아이콤은 3년마다 문화예술 정책을 논의하고 뮤지엄 간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글로벌 의회를 열어왔다. 27회차 주제는 ‘급변하는 공동체와 박물관의 미래’. 공공 플랫폼으로서 박물관의 역할을 강조했다. 필자는 이번 총회의 주요 안건을 분석하고, 최근 아랍에미리트 아트씬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한다.

국제박물관협의회 총회는 뮤지엄의 공식 정의를 논의하고, 다양한 학술 프로그램을 개최하는 교류의 장이다. Photo by AETOSWire

국제박물관협의회는 1946년 설립 이래 전 세계 박물관 전문가가 참여하는 주요 네트워크로 기능해 왔다. 2024년 공식 통계에 따르면, 아이콤은 개인 회원 60,410명, 국가위원회 120개, 기관 회원 4,016개를 포괄하고 있다. 아이콤 총회는 2004년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 데 이어, 올해 MENASA(중동, 북아프리카, 남아시아) 일대 최초로 두바이에서 개최되며 지역적 범위를 확대했다. 이번 총회에서는 ‘급변하는 공동체와 박물관의 미래(The Future of Museums in Rapidly Changing Communities)’를 주제로 다양한 관점을 논의했다.

국제박물관협의회 총회를 기념해 11월 14일 두바이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아랍에미리트 전통 타악기 공연이 펼쳐졌다.

아이콤 두바이 총회는 학술 프로그램과 투어, 개막식과 폐막식으로 구성됐다. 개막 첫날부터 4,500여 명의 참가자가 몰렸다. 등록 데스크와 보안 검색대에 긴 대기 행렬이 이어질 정도였다. 아이콤의 엠마 나르디(Emma Nardi) 회장, 메데아 에크너(Medea Ekner) 사무총장, 나시르 압델카림 알다르마키(Nasir Abdelkarim Aldarmaki) 아랍에미리트 의장이 개막 인사에 등판했다. 이어 두바이문화예술청 의장 라티파 빈트 모하메드 알 막툼(Latifa bint Mohammed Al Maktoum)의 개막 선언과 기조연설이 있었다. 아랍에미리트 문화부 장관 살렘 빈 칼리드 알 카시미(Salem bin Khalid Al Qassimi)는 MENASA 지역의 문화적 비전과 국제적 역할을 강조하며 환영사를 마무리했다.

학술 프로그램은 ‘보존(Preserve)’, ‘적응(Adapt)’, ‘촉매(Catalyse)’를 주요 키워드로 설정하고, 11월 12일부터 14일까지 진행됐다. 키워드 선정에는 박물관이 소장품 보존의 장소를 넘어 네트워크 플랫폼으로 확장해 가는 근래 경향을 반영했다. 먼저 12일에는 ‘보존’을 주제로 한 논의가 이뤄졌다. ‘디지털 미래 라이트닝 토크’ 섹션에선 뉴욕 프랫인스티튜트 교수이자 통합고고학 시각화·유산 연구실 책임연구자 우즈마 리즈비(Uzma Z. Rizvi)가 발표를 맡았다. 리즈비 박사는 인더스강 유역의 변화를 장기적으로 분석한 시각작업과 이곳의 발굴, 기후, 유물 정보를 한데 모은 대시보드를 선보였다. 박사는 “보존은 과거를 기록하는 일이 아니라, 식민 시대의 해석을 걷어내고 여러 주체가 함께 미래의 유산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이튿날인 13일은 ‘적응’을 테마로 삼았다. 도시화, 사회 갈등, 인구 이동 같은 급격한 변화와 일상의 디지털화에 박물관과 미술기관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새로운 공동체와 정체성 형성에 제도는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지 살폈다. 이날의 주제와 가장 직접적으로 맞물린 세션은 ‘아랍 도시의 예술과 창의성: 변모’였다. 아이콤 산하 파인아트미술관·컬렉션국제위원회(ICFA)가 주관했다. 세션은 카타르의 소프트 파워 전략을 비롯해 아랍에미리트의 문화 정책과 뮤지엄 생태계를 다뤘다. 도시 공간과 공공미술, 뮤지엄을 매개로 도시, 예술, 사람이 어떻게 엮이는지를 다양한 사례로 보여줬다.

마지막 14일의 주제는 ‘촉매’. 박물관의 역할을 공고히 드러냈다.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 핵심은 이렇다. 박물관이 전시를 넘어 정책, 외교, 공동체의 대화를 촉발하는 플랫폼이자 청년과 관객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실험의 장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특히 아랍에미리트 국제협력부 장관 림 알 하시미(Reem Al Hashimy)를 비롯한 연사들은 박물관이 ‘안전한 대화의 공간’을 제공해야만 갈등 이전의 단계에서 예방 외교가 작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서로 다른 관점을 조율하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사회적 내러티브를 만들어낸다고 피력했다. 마지막 날의 키워드 ‘촉매’는 박물관의 역할을 ‘보존’과 ‘적응’에서 확장해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마무리됐다. 미래 세대에 실질적 영향과 레거시를 남기는 촉매적 기관으로서의 박물관 역할을 강조했다.

폐막식에서는 2028년 차기 총회 개최지로 네덜란드 로테르담을 발표했다. 네덜란드 대표단은 “세대와 문화를 잇는 새로운 박물관 모델을 만들겠다”라며 전 세계 박물관 전문가를 초대했다. 이어 명예 회원 발표가 있었고, 아이콤 칠레,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회장을 역임한 베아트리스 에스피노자(Beatriz Espinoza) 등이 무대에 올랐다. 회장단 선거 결과도 함께 발표됐다. 신임 아이콤 회장에는 안토니오 로드리게스(Antonio Rodríguez)가 선출됐다. 부회장단에는 아이콤 아랍에미리트 의장 나시르 압델카림 알다르마키를 필두로 새로운 그룹이 꾸려졌다.

11월 22일 알세르칼애비뉴 마당에서 진행된 알세르칼아트위크 연계 프로그램 <Little Alserkal Explorers: Creative Trails for Curious Minds>. 미술교육가 루시 기획. Courtesy of Lucy Jung

박물관, 안전한 대화의 공간

한국에서도 장인경 철박물관장이 회장직에 도전하였으나, 근소한 차이로 3위에 이름을 올렸다. 당선으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한국 뮤지엄계가 아이콤에서 가진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이번 총회 기간에는 배기동 한양대 명예 교수가 아이콤 아시아태평양지역위원회가 신설한 ‘탁월한 박물관인상’의 첫 수상자로 영예를 안았다. 현장에서는 홍익대 문화예술경영대학원 권지연 교수가 국제전문인력훈련위원회 부회장으로 선임됐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한국 박물관계의 약진이 여러 군데에서 확인됐다.

아이콤 총회 기간에 맞춰, 두바이를 비롯한 아랍에미리트 방방곡곡에선 다채로운 미술행사가 펼쳐졌다. 먼저 샤르자아트뮤지엄과 샤르자아트파운데이션 방문으로 현지 아카이브 및 소장품 구축 방식을 살필 수 있었다. 샤르자아트뮤지엄은 술탄 빈 무하마드 알-카시미(Sultan bin Muhammad Al-Qasimi)가 소장한 오리엔탈리즘 컬렉션을 중심으로, 19세기 서구에서 제작된 아랍의 시각 자료를 공개했다. 현지 담당자는 자료의 일부 표현은 사실과 다르지만, 당시 환경을 파악하기에 좋은 자료라고 덧붙였다. 이후 전통시장, 인근 갤러리 등을 방문하며 샤르자의 일상과 동시대 미술현장을 목도했다. 샤르자아트파운데이션에서 열린 아프라 알 다헤리(Afra Al Dhaheri) 개인전 <Restless Circle>(8. 30~12. 14), 레다 라툰다(Leda Catunda) 개인전 <I like to like what others are liking>(9. 26~2026. 2. 8)은 샤르자 동시대미술의 분위기와 흐름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에이미 링컨 <Sun with Trees(Yellow Monochrome)> 패널에 아크릴릭 152.4×182.8cm 2025 알세르칼아트위크 두바이 테이무어그라네프로젝트 출품작. Courtesy of Taymour Grahne Projects

다음으로 방문한 두바이 니카프로젝트스페이스는 ‘글로벌 사우스’ 지역의 작가를 주로 소개해 왔다. 그룹전 <Rooted Echoes>(9. 10~11. 1)는 젊은 여성 작가 3인전이다. 야스민 알 아와(Yasmine Al Awa), 아헤드 알 카티리(Ahed Al Kathiri), 자흐라 주완지(Zahra Jewanjee)가 참여했다. 전시는 조부모의 공간을 회화로 표현하고, 할머니의 찬가를 텍스타일과 사운드로 해석하는가 하면 가프(ghaf) 나무를 모티프로 이주와 회복의 서사를 풀어냈다. 니카프로젝트스페이스 맞은편에 위치한 알세르칼애비뉴에선 아이콤 개최 시기에 맞춰 알세르칼아트위크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중동아시아의 주요 갤러리를 모은 구역이 화제를 모았다. 더써드라인, 카본12, 레일라헬러 등 두바이 갤러리가 주로 참여해 대표 작가의 작업을 선보였다. 공업 지대의 낡은 창고를 개조해 조성한 알세르칼애비뉴는 화랑뿐만 아니라 건자재상, 공유 창작소가 밀집되어 시너지를 내고 있다. 이 외에도 워크숍 공간 KAVE에선 팔레스타인, 르완다, 수단 등 다양한 국적에 뿌리를 둔 창작자가 활동하고 있었다. 다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협업과 확장이 이뤄지는 두바이의 미술생태계가 인상적이었다.

오늘날 아랍은 다름의 미학을 섬세한 기술로 직조하며 커다란 태피스트리를 짜고 있다. 한국이 ‘우리’를 말한다면, 아랍은 ‘가족’을 품는다. 한국은 검은 롱 패딩으로 균질한 겨울을 맞이하고 있지만, 아랍의 전통의상은 다양한 엠보싱으로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번 아이콤 두바이 총회는 차이를 대립이 아니라 공존의 방식으로 조율할 수 있음을 몸소 보여줬다. 서로 다른 길을 따라온 두 반도는, 박물관이라는 접점을 통해 다시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