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의 뜨개질
부산 KF아세안문화원에서 <바나나 잎을 땋는 마음으로>(8. 20~11. 3)전이 열렸다. KF아세안문화원은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필리핀 싱가포르 캄보디아 등 동남아시아 10개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기획전을 선보여 왔다. 가면, 향신료, 거리 음식에 이은 이번 전시의 주제는 ‘섬유미술’. 한국과 아세안의 섬유미술을 중심으로 직조 문화의 유연성과 연대성을 보여주는 5개국 작가 8인과 필리핀 사회적 기업 우븐이 참여했다. 고도화된 기술로 인내심은 떨어지고 매끈한 디지털 화면이 오프라인을 대체하는 오늘날, 전시는 ‘손’의 감각을 소환해 여유와 관용의 태도를 가지기를 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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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란 <티카르/메자> 판다누스 잎, 화학 염료 가변크기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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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선 <바나나 잎을 정성스럽게 땋을 거야!> 모사, 뽁뽁이 가변크기 2024
직조 행위의 즐거움
먼저 사진작가 이 이란(1971년생)은 말레이시아 소수 민족 바자우 사마 디라우트의 여성 직공과 협업한 직물 <티카르/메자> 연작을 선보였다. 티카르(Tikar)는 판다누스 잎으로 만든 동남아시아 전통 매트이다. 빨강, 노랑, 초록, 보라 등 산호초에서 영감을 받아 화려한 색감으로 짠 티카르는 센티미터 같은 서구 단위가 아니라 토착 여성 직공의 발걸음에 따라 크기가 측정된다. 작가는 여기에 탁자를 뜻하는 메자(Meja) 문양을 덧입혀, 서구식 위계가 도입된 동시대 말레이시아 문화를 겨냥했다. 바닥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누구든 대화에 참여할 수 있던 과거와 달리, 메자는 윗자리와 아랫자리를 구분하면서 가정 내 권력과 질서를 심화했다. 대화와 연결을 염원하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매트, 그곳에는 서구 문명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이 서려있다.
신예선(1973년생)의 <휴休>는 라텍스 베개에 울과 인공모를 붙여 만든 섬유 조각이다. 천장을 향해 뻗친 아이보리색 다리와 바닥에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의 기이한 조합. 고된 하루 끝에 퉁퉁 부은 다리를 거꾸로 올려 근육을 이완하는 현대인의 일상이 떠오른다. 한편 기둥에 설치된 <바나나 잎을 정성스럽게 땋을 거야!>는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유목민적’ 생활을 이어 온 작가의 배경이 담긴 작품이다. 기둥부터 바닥까지 축 처진 기다란 팔은 여기저기 이동하는 삶을 즐기면서도 한곳에 정주하고 싶은 양가적 욕망과 휴식에 대한 갈망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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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 엔시소 카투 <푸소: 필리핀 사람들의 심장> 단채널 비디오, 사운드 8분 2024
전시를 기획한 장인경 큐레이터는 “최근 미술계에서 섬유예술의 인기가 뜨겁다. 이번 전시는 무거운 사회학적 접근 대신 직조 행위가 지닌 본연의 즐거움과 치유, 재생 기능에 주목했다.”고 밝힌다. 전시장 한쪽에 관람객이 직접 직조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해 쏠쏠한 재미를 더했다. 카를로 엔시소 카투(1993년생)의 영상은 필리핀 현지인이 전통 음식 푸소(Pusó)를 위한 직조법을 알려준다. 푸소는 코코넛 잎에 쌀을 넣고 익힌 음식으로, 밥이 빠져나가지 않게 코코넛 잎을 촘촘히 땋는 기술이 관건인 요리이다. 필리핀 원주민 문화에서 탄생해 스페인 식민 지배 시기를 거쳐 지금까지 남아있는 전통문화로, 단순한 음식을 넘어 다종다양한 문화의 상징이 됐다. 전시장에는 코코넛 잎 대신 리본 끈이 놓였다. 영상을 보면서 누구나 쉽게 푸소의 직조법을 따라할 수 있도록 했다. 가깝고도 먼 아세안 문화를 한 땀 한 땀 더듬어 볼 수 있는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