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미술의 역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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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 아지잔 라만 파이만 <The Guardian at the Forbidden City> 캔버스에 유채 45×60cm 2012
한세예스24문화재단은 말레이시아 현대미술을 소개하는 국제 문화 교류전 <말레이시아를 품다 (Embrace Malaysia)>(3. 8~13 인사아트센터)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는 말레이시아 현대작가 12명의 작품 33점을 선보인다. 참여 작가는 아누렌드라 제가데바(Anurendra Jegadeva, 1965년생), 친 콩 이(Chin Kong Yee, 1973년생), 줄키프리 유소프(Zulkifli Yusoff, 1962년생), 라진더 싱(Rajinder Singh, 1964년생), 션 린(Sean Lean, 1981년생), 누르 아지잔 라만 파이만(Noor Azizan Rahman Paiman, 1970년생), 하미디 하디(Hamidi Hadi, 1971년생), 이반 램(Ivan Lam, 1975년생), 초이 춘 웨이(Choy Chun Wei, 1973년생), 웡 치 밍(Wong Chee Meng, 1975년생), 야우 비 링(Yau Bee Ling, 1972년생), 쳉 옌 펭(Cheng Yen Pheng, 1982년생) 등으로 회화, 사진, 비디오 등 다양한 매체를 망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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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키프리 유소프 <Craddock’s King> 캔버스에 혼합재료 122×92cm 2007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에 자리 잡은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 중국계, 인도계, 원주민 등이 각각의 문화를 지키면서 병존하는 국가다. 국교는 이슬람교이지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불교, 기독교, 힌두교가 공존한다. 다양한 민족과 종교는 특유의 역동적인 문화를 일구어냈다. 아트씬에도 복합 민족 국가 말레이시아의 역사와 전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박일호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교수가 감독을 맡았다. 그는 말레이시아 현대미술의 특징과 작품의 면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957년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배경으로 전개된 말레이시아 현대미술은 다문화 국가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상징화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번 전시는 말레이시아의 현재 모습과 고민을 다루는 현대미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 통해 기계화, 산업화된 사회에서 정체성을 찾는 우리나라의 현재와 부합하는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작가들은 사회 정치적 주제를 전달하지만, 일상적 내용을 소재로 주제를 재치 있게 담으려 노력하고 있다. 또 작품 구성 형식에서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요소를 뒤섞어 조화와 긴장감을 이루는 방식을 택한다.”
다문화 국가의 오늘과 내일
전시 참여 작가 대부분은 말레이시아의 민족적, 문화적 정체성과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사회 변화, 동양적인 것과 서양적인 것의 문화적 충돌과 대립, 새로운 시대의 조응 등에 관심을 두고 있다.
아누렌드라 제가데바의 <젬푸탄(Jemputan)>은 말레이시아 전통 의상을 입은 남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그림 아랫부분엔 ‘결혼식 초대장(Wedding Invitation)’이라는 글씨가 적혀있다. 신부로 보이는 여성은 미묘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고 앉아있으며, 그 옆에는 고개를 쳐든 거만한 자태의 남자가 신랑인 듯 서 있다. 아무래도 행복한 결혼식 장면이 아니다. 이 그림은 도대체 어떤 설정인가. 작품 제목 ‘젬푸탄’은 ‘결혼 신청’, ‘신부의 결혼 지참금’으로 번역할 수 있다. 작가는 말레이시아 전통 결혼 풍습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굴욕을 표현하고, 청산해야 할 인습에 강력히 문제를 제기한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세임 올드 송(Same Old Song)>은 하나의 액자 앞뒤에 전통적 관습에 묶인 여성과 현대적 여성의 모습을 양방향에서 대비시켰다. 작가는 서사적, 시적인 표현을 끌어들이면서도 도발적 주제를 과감하게 던진다. 누르 아지잔 라만 파이만의 작품은 선명한 색채와 간결한 구성, 어린이 그림 같은 유머러스한 이미지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유자재한 동물의 의인화, 사람의 동물화 등으로 나이브아트와 같은 소박한 조형의 특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역시 작품의 내용은 말레이시아의 사회적 문제에 초점을 두고 있다.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뤄냈지만, 그 과정에서 사회 한편에 남긴 어두운 그림자를 풍자한 그림이다. 불을 지핀 거대한 성냥개비를 뒤로 하고, 반인반수는 수류탄을 목걸이처럼 걸고 있다. 긴박한 현실의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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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누렌드라 제가데바 <A Garland for My Father> 채색한 캔버스에 라이트 박스 91×91cm 2019
션 린의 도자기 부조작품은 전통 청화 도자 문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한 작품이다. 자동차용 페인트와 철로 조각을 이어 붙였다. 작가는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겪고 있는 서구화와 정체성 문제를 작품의 주제로 삼고 있다.
<말레이시아를 품다>전은 작품 양식에 따라 전시를 네 섹션으로 구성했다. 제1섹션은 ‘매체 화합’. 평면과 사진, 입체, 영상을 혼합하고, 디지털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혼성의 미술을 시도하는 작가를 모았다. 아누렌드라 제가데바, 친 콩 이. 제2섹션은 ‘정체성’. 말레이시아의 민족, 국가, 사회,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작품으로 풀어낸 작가들로 구성했다. 민족 신화를 군상으로 풀어내는가 하면, 전통 도상이나 문양의 현대적 변주가 돋보인다. 줄키프리 유소프, 라진더 싱, 션 린, 누르 아지잔 라만 파이만. 제3섹션은 ‘경계를 넘어’. 구상/추상, 재현/기호, 심리적인 것/객관적인 것, 지역적 특수성/국제적 보편성 등 미술의 고착화된 이항 대립의 규범을 넘어서려는 작가들이다. 하미디 하디, 이반 램, 초이 춘 웨이. 제4섹션은 ‘일상과 나’. 일상의 삶이나 개인의 소소한 체험에서 도출한 이야기를 표현하는 작가들이다. 농경 사회의 기억 등을 일기 써 내려가듯 파노라마로 구성한 작품이 눈길을 끈다. 웡 치 밍, 야우 비 링, 쳉 옌 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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션린 <청화십팔나한향로(青花十八罗汉香炉)> 스틸에 자동차용 페인트 91×200cm 2022
한세예스24문화재단은 2014년 김동녕 한세예스24홀딩스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설립했다. 한국과 동남아시아 국가 간 문화 교류를 확대하는 다양한 사업을 주최 및 후원하고 있다. 2015년 베트남 미술전으로 시작해, 2016년 인도네시아 바틱전, 2017년 태국 미술전, 2018년 미얀마 현대미술전, 2019년 필리핀 현대미술전을 열었다. 2018년에는 심상용 서울대 교수가, 2019년에는 최은주 대구미술관 관장이 전시 감독을 맡았다.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지난 3년간 전시를 개최하지 못하다가, 2023년에 말레이시아 현대미술 전시로 국제 미술전을 다시 열게 되었다.
조영수 한세예스24문화재단 이사장은 이번 전시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말레이시아는 괄목할 만한 경제 문화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경제적으로도 우리나라와 깊은 관계를 맺어온 나라다.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나라 미술애호가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말레이시아의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기회가 되고, 양국의 문화 교류에도 기여하기를 바란다. 우리 재단은 앞으로도 아시아 각국의 숨은 미술작품을 찾아 꾸준히 선보일 계획이다”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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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진더 싱 <Saffron Songs> 캔버스에 아크릴릭 145×212cm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