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돌봄, 프로세스의 예술
토크, 강연, 심포지엄, 퍼포먼스, 스크리닝과 같은 ‘사건을 발생시키는(eventful)’ 미술실천은 오늘날 한국 미술현장의 특징처럼 보인다. 오브제 기반의 예술전시에 대조되는, 대안적 형태로서의 프로그램, 리서치 기반의 실험적인 배움을 추구하는 비판적인 문화 실천들은 교육적 전회 (educational turn)의 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시각적인 스펙터클에 반하는 큐레이토리얼 실천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배움 형태의 프로그램이 종종 미술전시 속 부대 행사로 포함되어 부차적인 역할을 떠맡을 때, 대안으로 여겨진 형식이 반복되어 규범화될 때, 결과물을 도출하는 데에만 몰두할 때는 기존의 방식과 과연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 보게 된다.
고착화된 전시와 작품의 만듦새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미술적 자기 돌봄(self-care). (이때 자기 돌봄은 상품화된 힐링, 웰빙처럼 한 개인에게 돌봄의 책임을 내맡기는 신자유주의적 자기 관리 기술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자기 돌봄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는 일, 세상을 보는 시각과 관점을 확립하는 일, 주체성을 구성하는 일을 의미할 때, 미술적 자기 돌봄이란, 미술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조건을 헤아리는 행위를 의미한다. 생산과 분배의 가치에 주목하기보다, 미술-하기에 내포된 복수적이고 다선형적인 시간 그리고 미술을 위해 필요한 장치와 제작 환경과 같은 구성 요소를 생각하는 것이다.
시스템의 성찰로 나아가는
미술-하기의 과정과 그에 내재되어 있는 맥락, 해석, 개념의 의미를 교차로 탐색하는 아티스틱 리서치(artistic research)는 창조적인 작업을 생산하는 기틀이 된다는 점에서 미술적 자기 돌봄 행위로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조사와 연구가 창작의 필연적인 과정으로서 미술생산의 토대가 되지만, 마치 돌봄 노동과 같이 효과와 경제성을 측정하기 어려워 그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다는 사실이다. 앎이란 지식의 결과만이 아니라 그 과정의 노력을 설명하는 일이라는 이론가이자 큐레이터인 이릿 로고프(Irit Rogoff)의 고찰을 따른다면, 미술의 창작 방식에 관해 구상하는 조사와 연구는 미술이 생산되는 구체적인 환경을 구성하는 일이다.
미술이 이뤄지는 토대를 탐색하는 행위의 유용성은, 작품에 내재한 관계망을 드러내며 미술제작 조건의 복잡한 그물망을 드러낸다는 데 있다. 돌봄을 중심에 놓고 미술을 사유하는 행위는 우리의 상호 의존성(interdependency)을 자각하게 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미술 노동자의 작업이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항상 다수와 관계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미술제작이 수많은 관계 맺음과 협업과 협상, 협의를 통해 이뤄진다는 사실은 창작의 태도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제작 과정에서 발생하는 관계와 협업이 제작의 형식을 궁리하고 실험하는 것으로 연장되는 것이다. 이처럼 미술적 자기 돌봄은 예술실천의 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더 나아가 미술적 자기 돌봄은 미술의 제도적 조건에 관한 고찰로 연결될 수 있다. 자기 돌봄은 비단 하나의 작품으로 귀결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장치와 재료, 조건, 미술계의 협업자들, 더 나아가 미술이 만들어지는 사회적 조건으로서 제도에 관한 성찰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테다. ‘기금이 집행되는 1년 단위에 맞춘 작품 제작 주기, 행정 서류와 같은 관료적 요소들이 미술창작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은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관행적으로 동결된 창작과 비평의 임금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까?’ ‘불평등한 위계로부터 안전한 미술제작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까?’ 자기 돌봄의 행위를 중심에 두기 시작한다면, 특정한 개념이나 담론으로 작품을 완성하거나 수동적으로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작의 상호 의존성 그리고 제도적 조건에 관해 필연적으로 고민하게 될 것이다. 동질화되어 가는 미술실천 형태에 관한 비판이 효과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부터 시작되는 돌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