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질문’이다
일상은 종종 거대한 무대이자, 모두가 배우로 참여하는 공연장처럼 느껴진다. 걸음걸이 하나조차 우리 사회의 특정한 맥락에선 작은 퍼포먼스가 된다. 영국의 언어철학자 존 오스틴은 언어가 단지 세계를 기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을 만드는 ‘행위’를 수행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이를 확장한 주디스 버틀러는 젠더를 비롯한 정체성 역시 반복되는 몸짓과 언어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민주 사회에서 즐비하게 일어나는 집회나 시위도 ‘수행적 퍼포먼스’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시선에서 보면 흔히 ‘촛불 집회’라 불리는 시위 풍경은 사실상 정치적이면서도 철학적인 퍼포먼스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손에 든 촛불로 어둠을 밝히며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을 빛으로 표상한다. 이는 자신이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일말의 기여를 하는 ‘주인공’ 중 하나임을 선언하면서, 집단적 연대의 감각을 몸으로 체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시민들은 거리에서 단순 시위대로 머무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정치 언어를 창조하는 무대의 배우가 된다. 특히 2016~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부터 집회의 이런 퍼포먼스적 성격이 극적으로 드러났다. 1,700만여 명에 달하는 인파가 SNS와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소통하며 ‘조직’이 아닌 ‘자발’로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을 만들었다. 디지털 시대의 촛불 집회는 오프라인 광장과 온라인 플랫폼을 결합해 개개인의 창의성과 참여가 얼마나 폭발적일 수 있는지 생생히 보여줬다.
SNS와 스마트폰이 만들어낸 수평적 네트워크는 시민의 자발적 동력을 일순간에 폭발시켰다. 이에 따라 시민의 일상은 실천적 퍼포먼스로 수렴되고, 그 정체성 또한 계속 수정되고 강화된다. 일상적 실천을 강조한 미셸 드 세르토의 ‘일상적 전술’ 개념이 디지털 공간에서 시민에 의해 곧장 실현된 셈이다. 전통적인 미디어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공급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시민이 스스로 메시지를 생산하고 확산하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광장의 에너지’가 만들어낸 결과 중 하나는 폭력 없는 평화적 저항이었다. 음악, 공연, 축제 등이 뒤섞인 집회 현장에서 시민은 온라인에서 학습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오프라인으로 발휘했다. 분노와 억압의 공간이 기쁨과 놀라움의 무대로 전환되는 풍경은 한국의 정치 문화가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준다. 축제처럼 다시 가꿔진 시위는 외부인에게 콘서트처럼 보일 정도였다.
촛불 집회만의 아이코닉한 상징성은 롤랑 바르트가 말한 ‘세 번째 의미’를 떠오르게 한다. 명시적 구호나 논리를 넘어 수많은 촛불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장면은 직관과 감각을 강렬히 자극한다. 이렇게 생겨난 울림은 간단히 언어로 환원할 수 없는 진동으로,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을 두드린다. 결국 촛불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작은 ‘몸짓 언어’가 되어, 광장에 모인 모두에게 미묘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촛불을 들고 함께 선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몸을 ‘정치적 기표’로 바꾸는 것과 다름없다. 촛불 집회는 단순한 항의를 넘어, 몸으로 말하고 몸으로 듣는 공론장이 된다. 한 목소리가 둘이 되고, 또 그 둘이 다섯, 열, 만으로 증폭하는 과정으로 우리는 연대감과 사회의 존재 이유를 체감하고 감동한다.
시민들은 세월호 참사 등 굵직한 사건을 마주하며 슬픔과 책임을 모두 함께 논의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촛불 집회는 때때로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고, 윤리적 반성을 이끄는 장으로 기능하며 또 한 번 공동체의 몸짓을 요구했다. 파편화와 양극화가 극심한 사회 속에서 갈 길 잃은 목소리 역시 이곳에 못을 박고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2024년 12월, 한국은 계엄령에 반대하는 촛불을 다시 밝혔다. 불과 일주일 만에 탄핵안이 발의됐다. 시민은 우리의 에너지가 어디로 향해야 할지 묻는 순간을 맞았다. 촛불은 단순한 불빛이 아니라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제 여기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촛불 집회의 미래와 민주주의의 지향점이 달라질 것이다. 촛불 집회가 지닌 정치적 퍼포먼스의 면모와 감각적 충격은 시민을 이전보다 더 주체적이고 성찰적인 존재로 이끈다. 바로 그 점에서, 촛불 집회는 현대 정치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계속해서 비추고 있다.
이상헌 / 1998년생. 런던 골드스미스대학 동시대미술이론 석사 과정. 동시대의 다양한 현상을 철학, 이론과 매개해 대중과 느슨한 연결점을 구축하는 데 관심을 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