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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을넘어발화로

아트인컬처평론프로젝트‘피칭’제12회선정자김지윤

2025/01/01

런던, 테이트모던 터바인홀에선 붉게 물든 과거의 잔상을 끌어안았고, 런던현대미술관(ICA)에선 미래의 대화를 제안하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우리는 어떤 몸짓을 취할 것인가?

터바인홀에서 펼쳐지는 ‘현대 커미션’ 전시는 종종 스펙터클을 감각적으로 담아내는 거대한 캔버스 역할을 한다. 현대 커미션 2024 이미래 개인전 <Open Wound>(2024. 10. 9~3. 16)도 이러한 방향성을 이어갔다. 이번 전시에서 터바인홀은 스스로 “산업적 자궁(industrial womb)”이 되어, 과거 영국 산업화 시기와 현대 기술 사회가 공유하는 불안을 쇠락의 감각으로 풀어냈다. 터바인홀 전체에 걸린 ‘피부들’은 탈락될 표피들로 치환되며, 홀 중앙에서 느리게 울컥거리는 터빈은 다시금 작동을 시작한 ‘살아있는 공장’으로 재해석된다. 미술관 주변에 걸린 걸개형 포스터에는 작품 이미지 대신, 붉은색 레이어를 덧입힌 채 텅 비어있는 터바인홀 이미지가 자리했다. 또한 미술관 공식 인스타그램은 음산한 음악과 함께 톱니바퀴, 핏방울, 연기가 피어오르는 공장 이모티콘으로 전시를 소개했다. 이는 산업화를 토대로 이뤄낸 제국주의의 망령을 상상케 한다.

테이트모던의 접근은 산업화와 제국주의로 점철된 자국 역사를 반성하고 위로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사회적 억압을 여성 주체로서 전복하고, 이를 비체(abject)의 미학으로 풀어내는 작가 이미래의 특수성을 가린다. 여기서 서구 제도권 미술관으로서 테이트모던이 가진 태생적 한계가 드러난다. <Open Wound>전이 품은 이야기는 단순히 산업적 공포로 환원할 수 없는 다층적 서사이다. 이미래는 광부의 목욕 공간인 피트헤드 배스(pithead baths)에서 작품의 영감을 받았다. 이 공간은 단순히 탄광 노동의 잔재를 씻어내는 곳이 아니라, 광부와 그의 가족이 공동체로 연결되는 장소였다. 이런 목욕 시설이 의무적으로 도입된 배경에는 탄광 먼지가 불러온 폐해를 증언하고, 가족과 자신을 지키기 위해 활동했던 여성들의 노동과 저항의 목소리가 있었다. 탄광의 암흑을 돌봄과 사랑으로 씻어내린 여성의 존재는 지워진 역사를 넘어서고 남성 중심 서사를 찢어내, ‘늘어지고 구멍 난 피부’라는 포털로 우리와 마주한다.

“궁극적으로 나는 모든 인간 행동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성, 희망, 연민, 사랑, 그리고 사랑받으려는 욕구와 같이 부드럽고 취약한 것들에 관심이 있다.” 테이트모던의 설명 중 몇 안 되는 이미래의 말로, 터바인홀에 걸린 수많은 ‘피부들’이 쓸려 내려가 사라지는 표피가 아니라 타자성을 기록하고 돌봄과 연대를 상징하는 초국가적 매개체임을 확인할 수 있다. 테이트모던이 작품을 남성 중심 노동 서사로 이루어진 산업화에 대한 위령비로 세우고 이를 ‘감각적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동안, 그 이면에 있는 돌봄과 사랑, 여성 연대의 서사는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가?

한편 비슷한 시기에 열린 정금형 개인전 <Under Construction>(2024. 9. 25~12. 15)에서 ICA는 기꺼이 정금형이 ‘공사 중인(under construction)’ 무대가 된다. 전시는 작가가 소비 중심 사회로 급성장하던 서울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맥락을 면밀하게 짚고, 후기 자본주의라는 글로벌 담론에서 정금형이 지닌 특수성에 주목했다. 전시장 바닥에 놓인 인체 골격 모형과 기계는 점진적으로 결합하고 조립된다. 한 달여간 네 번 진행된 퍼포먼스는 기계와 인간의 관계에 대안적 시선을 제시했다. 여기서 관객은 긴장감에서 출발해 점차 교감과 대화로 나아가는 관계의 증인이 됐다. 전시 기간에는 작가가 직접 선정한 세 편의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제임스 웨일 감독의 <프랑켄슈타인>(1931)이었다. 여기서 ‘공포’라는 화제는 다층적 서사를 함께 열고 가능성을 탐색하는 갈래로 작동하며, 휘발되거나 소비되는 감각에서 벗어나게 한다.

현재 글로벌 미술계는 불균형한 지형도를 인식하고 초국가적 연대를 모색하고 있다. 이때 우리는 어떤 몸짓을 취할 것인가?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미래가 건져 올린 피부의 너덜거리는 구멍이 타자와 맞닿는 포털이 되고, 정금형의 몸짓으로 몸과 기계가 친밀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 발화되지 않던 존재들의 목소리가 비로소 울려 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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