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시대의 노래
브레히트의 말이 생각난다. 어두운 시대에도 노래라는 게 있을까. 정세에 민감하게 개입하는 예술적 실천은 오늘날 다양한 형태로 소외된 존재에게 목소리를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기획은 억압받는 존재에 발언권을 주고,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그들이 행위할 수 있는 무대로 전치한다. 또 이러한 작업은 마치 자유롭게 말하고 행위하는 것만이 능동적이며, 사회적 타자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능동적 행위성은 자동으로 보장될 것이란 생각을 공유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발화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동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깔려있다.
실제로 우리는 듣기를 수동적인 행위라 생각하기 쉽다. 어떠한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선택적으로 수용할 수 없으며, 의도하지 않더라도 들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이트 레이시의 말을 빌리자면 듣는 행위는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능동적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태도다. 듣는 사람이 없다면 말하는 것은 그저 소음으로 남고, 말할 이유조차 사라진다. 더욱이 말하는 사람이 듣는 사람이 아니라면 무대 위에는 비정상적인 소통만이 남는다. 따라서 문제는 자유로운 발화 이전에 우리가 얼마나 타자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숙고할 ‘연습’이 되어 있는가로 바뀐다.
성북구립미술관의 지역 맞춤형 미술 교과서 제작 프로젝트 중 하나인 다이애나밴드의 『향하는 귀』 (2024)는 발화의 조건인 ‘듣기’에 관해 질문한다. 다이애나밴드에 따르면 소리내기는 사회적 행동과 닮아있다. 우리는 다른 존재의 진동과 공명하며 조화를 이루기도, 불협화음을 만들며 적대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듣기 연습은 다른 존재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그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듣기라는 비일상적인 수행은 듣는 행위로 어떻게 이전과 ‘다르게’ 연결될 수 있는지 질문하고, 나아가 현 사회의 구성과 배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역설적인 행위다.
다이애나밴드의 듣기 연습은 이중적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즉, 듣기는 열린 감각으로 자신 혹은 ‘우리’라는 집단을 이해하는 것이자,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듣기란 우리와 마주치는 존재들과 어떻게 함께 조응하여 소리를 낼 수 있는지에 대한 탐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듣기라는 ‘수동적’ 행위는 역설적으로 ‘능동적’ 행위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더욱이 이는 인간과 인간 사이 관계에 국한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듣기는 더욱 넓은 범주에도 적용될 수 있다. 캐스파 핸더슨이 말하듯, 기후 변화가 지구 위 생명에 미치는 영향 또한 숲과 다른 생태계의 소리 변화를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
듣기라는 타율적 행위는 자율적 행위를 위한 준비 단계고, 이질적인 행위자들이 존재하는 사회 속 갈등을 이해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다이애나밴드의 듣기 연습은 예술적 작업이기 이전에 하나의 교육적 실천이다. 교육학자 거트 비에스타는 우리가 자연 및 사회로서의 세계 ‘안에서’, 그리고 그런 세계와 ‘더불어’ 어떻게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가를 교육의 핵심적인 질문으로 보았다.
나아가 듣기는 예술의 온전한 자율성이 순전히 허구라는 점을 일깨운다. 예술은 사회적 진공 상태에 있는 게 아니라, 무수히 많은 소리와 존재들과의 갈등으로 이루어진 사회 내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체로 존재하기는 타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기 독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위하는 것, 또는 외부적 결정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세상과 대화하며 존재하기, 즉 “세계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고 세계 속에 존재하기”를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다이애나밴드의 듣기 연습은 한정된 물질적·사회적 세계 속에서 다른 유한한 존재와 어떻게 대화하며 살아갈 수 있을지 묻는다. 이들은 타자에게 목소리 낼 기회를 제공한다는 간편한 대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 타자들의 소리를 어떻게 경청할 것인지 묻는다. 만약 우리가 귀를 기울인다면, 그곳에는 어두운 시대에 대한 노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