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시간의 필름

평론 프로젝트 ‘피칭’ 제20회 선정자 김호원
2025 / 09 / 08

이미지가 넘쳐날수록 세계는 더욱 멀어진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광자를 전기 신호로, 다시 0과 1의 코드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빛은 본래의 물리적 속성을 잃는다. 디지털 이미지는 생성되는 순간부터 추상적 기호로 전락하며, 세계와의 연결 고리를 잃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범람하는 이미지 속에서 오히려 단절을 느끼고, 현실조차 무감각하게 받아들인다.

이 맥락에서 로터스 강과 로사 바바의 작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작가는 아날로그 셀룰로이드 필름을 주요 매체로 삼는다. 광화학 반응으로 세계와 직접 접촉하는 필름은 빛에 노출되는 순간부터 계속 변화하는 불안정한 매체다. 하지만 두 작가는 바로 이 불안정성에서 필름이 시간의 두께와 기억의 무게를 획득한다고 본다. 필름의 지속적인 변질과 예측 불가능한 반응은 세계와 관계 맺는 고유한 방식이다. 그들에게 필름은 단순한 재현 도구가 아니라 환경과 시간의 흔적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세계와 함께 변화하는 공동 행위자다.

로터스 개인전 <Already> 전경 2025 뉴욕 52워커 Courtesy 52 Walker, New York

뉴욕 52워커에서 개최된 로터스 강의 개인전 <Already>(4. 11~6. 7)는 작가가 주변 환경에 따라 줄곧 변화하는 필름을 통해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풀어내는 방식을 보여준다. 전시의 핵심을 이루는 <Molt>(2022~25) 연작에서 그는 뉴욕, 시카고, 토론토 등 서로 다른 도시를 무대로 필름을 오랜 시간 빛에 노출해, 각 도시의 환경을 화학적 그을림으로 새겨 넣었다. 로터스 강에게 필름은 인간의 피부와도 같으며, 작가는 광화학 변색 과정을 ‘태닝’에 비유한다. 정착액으로 처리하지 않은 필름은 전시 기간 내내 관람객의 체온과 호흡에 반응하며 미세한 변화를 거듭한다. 한편, <Receiver Transmitter(49 Echoes)>(2025)와 <Azaleas II>(2025)는 필름 제작 과정 자체를 전시 일부로 끌어들인다. 전자는 필름 노출용 온실 구조물, 후자는 회전식 건조대로 만들어져 전시의 시간적 범위를 전후로 확장하며, 그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린다. 전시 제목 ‘Already’는 김혜순의 시 「이미-스무여드레」에서 빌려와, 과거와 미래가 현재에 맞물리는 시간의 역설을 가리킨다. 불교의 ‘중유(中有)’ 공간처럼, 작가의 필름은 삶과 죽음, 여기와 저기 사이의 경계적 상태를 물질화한다. 영원히 완결에 이르지 않는 로터스 강의 필름은 고정된 정체성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디아스포라의 경험을 온몸으로 체화한다.

로사 바바 개인전 <The Ocean of One’s Pause> 전경 2025 뉴욕현대미술관 Photo: Jonathan Dorado © The Museum of Modern Art

로사 바바는 뉴욕현대미술관 개인전 <The Ocean of One’s Pause>(5. 3~7. 6)에서 셀룰로이드 필름의 물질성과 아날로그 영사 장치의 기계적 특성을 전면에 내세워 기술 인프라의 숨겨진 물리적 토대를 드러낸다. <Charge>(2025)는 태양광 패널, 입자 가속기, 천체 관측소 등의 이미지를 몽타주해 빛이 에너지에서 정보로, 다시 권력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태양광 패널이 빛을 전력으로 변환하는 장면은 필름의 광화학 반응과 겹치며, 기술 진보의 서사를 물질의 원초적 반응으로 되돌린다. 이를 재생하는 영사기의 소음과 열은 이미지 배후의 노동을 환기하며 관람을 기술-정치적 사건으로 바꾼다. 세 점의 <Wirepiece>(2022/25) 연작은 이 개념을 공간 설치로 확장한다. 16mm 필름이 영사기를 벗어나 전시장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필름에 맞닿은 현을 울린다. 그 표면에 켜켜이 쌓이는 스크래치와 먼지, 맥박처럼 전시장을 채우는 울림은 전 지구적 네트워크와 에너지의 순환을 물리적으로 체현한다. 영사된 빛이 벽면과 관객의 몸을 임시 스크린으로 만들 때, 우리는 이미 그 회로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빛이 신호로 축소되고 세계가 데이터로 환원된 시대, 로터스 강과 로사 바바의 작업은 이미지가 다시 세계와 조우할 가능성을 모색한다. 지속적인 ‘되기(becoming)’ 상태에 놓인 이들의 필름은 세계를 단순히 기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세계와 함께 변화하며 새로운 관계 맺기를 제안한다. 필름의 물질적 불안정성은 결함이 아니라 세계와의 가장 직접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느리고 비가역적인 변형은 우리가 세계와 맺을 수 있는 또 다른 친밀성을 열어젖힌다. 지금도 변화하고 있는 그들의 필름 표면은 즉각성과 휘발성이 지배하는 디지털 이미지를 넘어 더 느리고 깊으며, 두꺼운 시간을 상상하라는 급진적 제안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