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통을 입고, ‘특급 미래’로
안은미(1963년생)는 현대무용과 퍼포먼스로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파격의 세계관을 펼쳐왔다. 그가 최근 세종문화회관에서 아시아의 다채로운 문화를 재해석한 신작 <동방미래특급>(5. 2~4)을 선보였다. 필자는 색과 리듬이 화려하게 교차하는 무대에서 오리엔탈리즘을 깨부수는 비판적 실천을 포착한다.
조명이 어둠을 걷어내기 전, 가장 먼저 관객을 맞는 것은 쟁반처럼 둥근 화면이다. 18세기부터 유럽 시각문화에 축적된 오리엔탈리즘의 도상들이 인공 지능의 손길을 타고 유령처럼 깨어난다. 프랑수아 부셰의 <보두앵 부인의 초상>에서 이국의 새를 든 여인은 나긋하게 눈을 깜박이고, 장-에티엔 리오타르가 그린 튀르키예풍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나른히 책을 읽는다. 비서구 지역을 배경으로 한 고전 할리우드 영화 장면까지 겹쳐지며, 공연은 마치 움직이는 박물관처럼 시작된다.
<동방미래특급>은 이 도상들을 소환해 패러디하거나 몸의 언어로 분해하고 뒤섞는다. 예컨대 ‘뱀 춤’은 오리엔탈리즘 회화에서 반복된 도상인 ‘뱀을 부리는 자’를 연상시킨다. 피리로 독사를 조종하는 이 도상은 동양의 이국성, 야성, 원시적 신비를 상징하는 클리셰다. 반면 공연에서의 뱀춤은 초록색 벙어리장갑, 팔을 미끄러뜨리는 동작, 놀란 표정의 코믹한 안무로 구성되었다. 유쾌한 몸짓은 동양을 비이성적 본능으로 형상화했던 클리셰에 익살스럽게 맞선다. 원시와 신비라 이름 붙여진 도상들은 무대 위에서 휘청이고, 박물관적 시선은 균열을 일으킨다.
공연은 도상의 패러디에 머물지 않는다. 아시아의 역사와 미학을 품은 전통 무용과 무술을 차용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했다. 장대를 뛰어넘는 필리핀의 전통무 ‘티니클링’은 아크로바틱한 몸짓으로, 정교한 손동작이 특징인 인도네시아의 ‘르공’은 디지털 리듬에 맞춰 쪼개지고 반복됐다. 얼굴을 가린 채 시연되는 한국의 살풀이는 여성적 미학으로 고정되어 온 몸의 이미지를 조용히 흔든다. ‘동양적 상징’이 유희의 재료로 전환되고, 도상으로 고정할 수 없는 몸이 무대를 휘감는다. 전통은 고정된 형식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감각으로 되살아났다.
의상 역시 이 공연의 서사를 구성하는 중요한 축이다. 안은미가 직접 디자인에 참여했다. 젠더의 구분, 민족의 경계가 없는 의상이다. 형광, 야광, 스팽글 같은 기계적 광택의 소재가 서구 시각 문화에 깃든 응시 구조를 튕겨낸다. 이 현란한 질감은 시누아즈리(Chinoiserie)나 자포니즘(Japonisme)의 장식성, 실크와 레이스로 대표되는 부드러운 감각과는 결이 다르다. 앞서 등장한 고전회화와 영화 속 이미지는 젠더화된 미학의 전형으로, 공연은 이처럼 코드화된 장식의 문법을 벗겨낸다. 인공 빛과 과장된 질감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다름 아닌 ‘몸’이다.
<동방미래특급>은 서구 시각 문화가 ‘오리엔탈리즘’ 아래 진열하고 응시해 온 이미지를 신체로 되돌렸다. 초연을 시작으로 세계로 나아갈 이 공연은 ‘동양’이란 관념을 사운드, 특수 소재, 그리고 몸을 통해 다시 써 내려가는 여정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