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이름, 예술의 풍류
서보(栖甫)란 이름이 아니었다면 박서보란 화가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명 박재홍으로썬 도무지 박서보란 화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다(화가에겐 죄송한 말이지만). 이름이 그 화가를 만드는 것인가. 평범한 이름으로써 뛰어난 화가를 좀처럼 볼 수 없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이름이 그 화가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될 것 같기도 하다.
미술대학 동기인 박서보와 이수헌은 각각 본명이 박재홍, 이원용인데 이들이 일찍이 이 이름으로는 뛰어난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래서 한학에 박식한 동기인 M에게 작명을 부탁한 것이다. M이 서보, 수헌(樹軒)을 지어와 각각 고르라고 했더니 박재홍은 서보를, 이원용은 수헌을 선택해서 박서보, 이수헌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이때 두 사람의 선택에서 무언가 운명 같은 그림자가 보인다. 박재홍이 수헌을 선택해서 박수헌이 되고 이원용이 서보를 선택해서 이서보가 되었다면 오늘날 박서보, 이수헌은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이수헌(왼쪽)과 박서보. 1954년 겨울 광주육군보병학교 CSMC 훈련 중에.
박서보 하면 굳이 화가가 아니더라도 중국 무협 소설에 나오는 강남 무림의 고수 이름을 떠올리게 한다. 한 세력을 이끄는 보스를 연상시킨다. 서는 ‘쉴 서’ 또는 ‘새들이 깃들일 서’로 나오고 보는 ‘클 보’, 자랑스러운 남아란 의미다. 반면에 수헌은 숲속의 집이니까 깊은 산속의 암자를 가리킨다. 서보가 활동적인 이미지를 함축하는가 하면, 수헌은 산간의 암자에서 면벽 수행에 몰두해 있는 선승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들의 예술세계가 고스란히 이름에 오버랩된다.
이름이 그 화가의 작품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면 실없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나, 예컨대 한묵(韓默) 하면 견고한 콤포지션의 추상 화면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본명인즉 한백유(韓百由)로선 도무지 그의 추상 세계와 어울리지 않는다. 화가이자 조각가인 문신(文信)의 본명이 문안신(文安信)인데 문안신으로썬 절제되면서도 대칭이 뚜렷한 그의 작품 세계를 연상할 수가 없다. 하물며 본명 김만두(金萬斗)로써 어찌 탄력적인 김경(金耕)의 작품을 떠올릴 수가 있겠는가. 김경은 그와 절친했던 시인 장호(章湖)가 지어줬는데 밭을 가는 농부와 같이 열심히 밭(창작)을 일구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했다. 그가 많이 그린 소재 중에는 명태가 있는데 그의 풍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꾸준히 밭을 경작하는 농부의 모습도 엿보이지만 동시에 명태의 이미지도 떠올리게 된다.

한묵. 1974년 파리의 판화 공방 아틀리에17에서.
몇 해 전에 작고한 내 친구 이정수(李正守)와 시인 김상옥 선생이 운영하던 인사동 골동 가게 ‘아자방(亞字房)’에 들렀던 일이 있다. 1960년대 후반경이니까 벌써 반세기가 지난 이야기다. 이름이 화제가 되었는데 내 이름 오광수가 영 못마땅해서 여러 차례 개명을 결심한 적이 있다고 했더니 김 선생 왈 이광수(근대기 소설가)가 있으니까 김광수, 박광수 하면 평범해지지만 오 씨에 광수가 붙으니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개명의 숙제는 접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 친구의 이름을 보더니, 이정수란 이름은 어느 시골 이발소에서 일하는 사람 같다는 것이다. 너무 평범해서 화가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가뜩이나 이름에 콤플렉스를 지니고 있던 친구의 의기소침이라니. 이 친구는 60년대 후반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가 고등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작가 활동도 꾸준한 편이었는데 먼 훗날 이름이 바뀐 것을 알았다. 이수(李水)라고 했다. 한자 정수(正守)에서 수(水)로 바뀌었으니까 완전히 개명한 것이 된다. 이수 하니까 화가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보였다. 그래서인지는 모르나 이름이 바뀌고부터는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고 작품도 전보다 훨씬 무르익음을 엿볼 수 있었다.
대개 외자 이름은 스스로 절제하는 함축미를 보인다. 화가가 외자로 개명하는 데는 이 같은 결기를 느끼게 한다. 50년대 후반에 등장한 그룹으로서 당시 중견 작가로 구성된 ‘모던아트협회’엔 유독 외자 이름이 많은 것이 눈에 띈다. 한묵, 김경, 정규, 문신이 그들이다. 이 단체는 국전과 같은 아카데미즘에 맞서 재야의 창조적 풍토를 지향했는데 그룹으로서 조형 이념의 동질성은 그렇게 뚜렷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반대로 각자가 지닌 개성이 두드러져 이들이 변혁의 주역이 되지 않을까 관심을 끌고 있었다. 각자의 개성이라는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앞서 든 외자의 이름과 더불어 유영국, 황염수, 이규상, 정점식, 박고석이 그룹의 멤버였는데 이 이름들에서 느끼는 것은 고집이 센 화가들의 결속체 같은 인상을 주어 인화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런대로 별 갈등 없이 6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문신, 한묵이 파리로 떠나고 김경, 이규상이 작고하면서 자동 해체될 수밖에 없었다.

문신. 1984년 창원 추산동 아틀리에에서.
외자 이름은 훗날 화가 스스로 짓는 경우도 적지 않은 편이다. 본명은 따로 있고 필명 겸 예명으로 사용하다가 그대로 본명으로 변하는 예도 적지 않다. 산을 많이 그린다고 해서 ‘산의 화가’로 불리는 서양화가 김원(金源)은 본명이 김원진(金源鎭)이다. 평양 출신으로 동란 때 월남해 온 화가이다. 언젠가 들려준 이야기인즉 통일이 되어 고향을 되찾게 되면 그때 본명을 사용할 것이라 했는데 끝내 본명을 찾지 못한 채 작고하였다. 최근에도 외자로 바꾼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박창돈이 박돈으로, 이영배가 이배로 쓰는 경우다. 예술가들은 본명 외에 예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관습화되어 있어 별로 거부감을 못 느낀다.
이름만 들어도 화가-예술가를 떠올리게 하는 케이스가 박고석(朴古石)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획도 심플하면서 예스러움이 함축되어 있다. 그 역시 중반 이후는 거의 산만을 그렸기 때문에 대표적인 ‘산의 작가’로 불린다. 이름이 그가 그리는 소재와도 너무 잘 어울린다. 그림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과묵한 인간적 풍모가 자연스럽게 이름에 겹친다. 이름자가 옛 돌이고 성씨가 박 씨니까 금상첨화다. 김고석이니 이고석 하면 그만 평범해지고 만다. 왜 옛 돌이냐고 어떤 기자가 묻는 것을 옆에서 들은 적이 있는데 화가의 대답이 멋지다.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옛 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했다.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무게감뿐 아니라 그 우아한 모습이 서양 문화의 정체를 능히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파르테논의 신전 대리석보다는 우리의 산하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는 화강암 마애불의 오랜 세월을 두고 마모된 어리숙한 모습이 더욱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예술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구수한 옛 돌에 비길 만했다.

정규. 자신의 작품 옆에서.
이름이 박고석이라면 아호는 단연 수화(樹話) 김환기다. 글자의 결구도 짜임새가 있을 뿐 아니라 부름에서도 여운이 있다. 대개 아호는 남이 지어준다고 하는데 김환기는 자신이 지었다. 그 작호의 변을 보면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하튼 호적의 이름이 싫어서 나도 따로 내 이름을 하나 갖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글자를 모아놓고 거기서 나무 수(樹) 자를 얻기는 했으나 수 자 밑에 붙일 글자를 좀처럼 얻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수 자 하나만을 붙일까도 했으나 ‘여보게 수’하고 부를 경우에는 아주 틀려먹었다. 여하간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말씀 화(話) 자를 생각해 낸 것은 수 자를 발견하고 나서 한참 후인 것 같다. ‘수화’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시각적으로나 청음으로나 내 딴에는 정통으로 들어맞았다고 생각돼서 그땐 약간 혼자서 기뻐했던 것 같다.” 시각이나 소리에 못지않게 글자의 내용이 숲의 이야기이니까 한결 우아함을 더하고 있다.
대개 아호를 쓰는 경우는 막역한 사이, 더욱 친밀감을 지닐 수 있는 자리에 어울린다. 그림에 낙관을 하는 경우도 아호와 더불어 이름을 쓰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대로 오면서 서서히 그 풍속이 사라져가고 있다. 아호 대신 무슨 무슨 선생이니 화백이니 하는 호칭이 일반화되어 옛날처럼 친밀감이 약화되고 있다고 할까, 무미건조한 느낌이다. 그러나 동양화의 경우는 아직도 낙관을 할 때 아호를 쓰는 관습이 유지되고 있다. 과거에는 서양화가나 조각가도 아호를 사용하였는데 언제부턴가 서양화가나 조각가의 아호는 엿볼 수 없게 되었다.

박고석. 1978년 설악산에서의 현장 스케치. 촬영 강운구.
옛사람들은 아호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보통 두서너 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19세기 김정희는 널리 알려진 추사(秋史), 완당(阮堂) 외에도 수십 개에 이르는 아호를 가지고 있었으니 이쯤 되면 아호 취미라고 할 만하다. 아무 곳이나 같은 아호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나 글씨의 내용에 따라 사용하였으며 작화 당시의 기분에 따라 아호를 사용하였다. 가히 고상한 취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서화가들 가운데는 집 재(齋)니 뜰 원(園)이 들어간 아호가 많다. 그래서 ‘삼재’니 ‘삼원’이니 하고 묶기도 했다. 공재(恭齋) 윤두서, 겸재(謙齋) 정선, 관아재(觀我齋) 조영우, 현재(玄齋) 심사정,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 등 조선조를 대표하는 화가들이 꼽힌다. 현대에는 산(山)이니 당(堂)이 많은 편이다. 아산(雅山) 조방원, 옥산(沃山) 김옥진, 유산(酉山) 민경갑, 운산(雲山) 조평휘, 대산(對山) 김동수, 소산(小山) 박대성, 이당(以堂) 김은호, 오당(吾堂) 안동숙, 제당(霽堂) 배렴, 화당(和堂) 김재배 등이다. 그리고 스승이 아끼는 제자에게 자신의 호 가운데 한 자를 붙여주는 경우가 있다. 심전(心田) 안중식이 노수현에게 심(心) 자를 떼어 심산(心汕)으로, 이상범에게는 전(田)을 떼어 청전(靑田)이라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선친의 호를 따라 짓는 경우, 이대원이 부친 아호가 일경(一耕)인데 자신의 호를 이경(二耕)이라 한 것은 아호에서 존경의 염을 엿볼 수 있다.
남의 아호 짓기가 어려운 반면 이를 받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즉흥적으로 지어 잘 사용하는 경우는 부러움을 산다. 평론가 이경성은 아호가 석남(石南)인데 가까운 친구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옛 현판을 선물로 주었는데 거기 쓰인 글씨가 ‘석남서실’이어서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호를 삼아 사용했다. 자신의 선친의 묘소가 있는 동리가 석남동이어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결코 의미가 없지 않은 것이 되었다.

김기창과 박래현. 1967년 가을 도미 부부전을 준비하며.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60년대 초반 몹시 가난했던 시절 동양화가 송수남과 같이 하숙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송수남은 완산(完山)이란 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자기 고향의 옛 명칭이라고 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이름이나 고향 근처의 산 이름을 따서 아호를 짓는 경우가 적지 않은 편이다. 송수남의 완산도 이 경우에 속하는 셈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영 아닌 것 같았다. 노티가 심하게 났다. 어느 날 “완산이 뭐야, 촌스럽게. ‘그리운 고향은 남쪽 하늘 아래’란 의미의 남천(南天)이 어때.” 했더니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마침 내가 카프(KAPF) 계열의 소설가 김남천의 소설집 『맥』을 읽고 있었는데 이름으로서 남천은 억센 편이어서 좋지 않았으나 호로 사용했을 때는 괜찮아 보였다. 더구나 송수남이란 이름의 끝 자가 남녘 남이니 남천 송수남 하면 첫 자도 남이고 끝 자도 남이니 전체로 보아 격조가 있어 보였을 뿐 아니라 부름에 있어 여운이 있었다. 그런데 남의 이름을 즉흥적으로 따온 것이 영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참 후에 남천을 쓰기 시작했다. 아호의 덕인지는 모르나 남천을 사용하면서 운세가 펴지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교사로 있다가 모교인 홍대 교수로 자리를 옮기더니 작품 활동도 전에 없이 활기를 띠었고 여러 국제전에도 출품하는 등 작가로서 상승세를 탄 느낌이었다.
언젠가 백계(白溪) 정탁영이 내 근무처(환기미술관)에 놀러 왔다가 내 호를 지어주겠다고 했다. 내 이름에 물가 수(洙)가 있으니 물가엔 돌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그것도 빛(光)을 받아서 흰 돌이 말이야, 그러곤 흰 돌이란 뜻의 소석(素石)이라고 지어주었다. 그러나 나의 경우, 글을 쓰는 사람이 아호를 쓸 기회가 별로 없었고 멋 부리느라고 아호까지 쓴다고 핀잔을 받을 것 같아서 고스란히 인장까지 만들어준 것을 장롱 깊숙이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변종하. ‘허참’이라는 그의 아호는 탄식조 같다.
아호를 자신의 어떤 의지의 표명으로 고쳐 사용하는 독특한 예도 있다. 운보(雲甫) 김기창이 그 한 예다. 그의 원래 아호는 운포(雲圃)였다. 그것을 해방이 되면서 끝 자를 바꾼 것이다. 어떤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의식의 발로로 포(圃)의 테두리를 벗어버린 것이다. 자신을 에워싸고 있던 굴레를 벗어 자유를 찾겠다는 의식의 발로였다. 이에 상응되듯 해방 후 김기창의 화풍은 고삐 풀린 말처럼 내달리는 질풍노도의 그것이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특선과 최고상을 잇달아 탄 작품들이 한결같이 풍속적인 테마의 것들로 단아한 화격을 지닌 것에 비한다면 해방 후의 작품들은 극도의 대비를 보여준 일탈의 화격이었다. 해방이 되면서 미술계에 불어닥친 화두가 왜색 탈피와 민족미술 건설이었는데 운보는 누구보다도 이 대열에 적극성을 보였다. 일본화의 잔재에서 벗어나려는 의욕은 1950년대에 이르면서 해체와 구성이란 방법의 전개로 나타났는데 이는 그의 아호의 개작에 이미 반영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신이 쌓아온 테두리를 대담하게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방법이 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왜색 탈피와 민족미술 건설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이들로 서울대의 김용준과 장우성이 교육 현장에서 새로운 민족미술의 양식 탐구에 앞장섰다면 개별로는 이응노와 김기창과 그의 부인 박래현을 꼽을 수 있다. 김기창과 박래현은 잘 알려진 대로 부부 화가다. 이들은 결혼하면서 매년 부부전을 갖기로 서로 약속했는데 이는 단순히 사이좋은 부부 화가를 자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내보인다는 결의의 산물이었다. 이 부부전은 박래현이 미국으로 잠시 유학을 가기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들이 보여준 새로운 방법의 모색은 해방 후 동양화의 모색에 가장 돋보이는 성과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부인 박래현의 아호가 우향(雨鄕)이었는데 실험의 길에 의기투합한다는 의미가 반영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운보의 구름 사내와 우향의 비의 고향으로 서로에게 화답한다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구름이 지니는 외향적, 저돌적, 행동적인 속성에 비해 비가 내향적, 수동적, 정서적이기 때문이다.

박생광. 그는 57세에 아호를 ‘내고(乃古)’로 짓고 활동했으나, 80세부터 ‘그대로’라는 우리말 아호도 함께 썼다.
한글로 아호를 정하는 경우도 있다. 박생광은 내고(乃古)란 아호를 주로 사용하면서도 후반경에 와선 때때로 ‘그대로’란 순우리말 아호를 사용하였다. 그대로는 써놓고 보면 우아한 여운이 풍기지만 호칭할 때는 좀 어색하지 않나 생각한다. 부르기가 어색한 것은 변종하의 아호 허참(虛參)이 있다. 어이가 없는 경우 ‘허— 참’ 하는 탄식조를 그대로 아호 삼은 내면엔 다소 시니컬한 기미를 느끼게 한다. 남이 부를 때는 아무래도 어색할 것만 같다. 그를 향해 허참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다. 부르는 사람이 자칫 자탄에 빠질 것 같기만 하다.
허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조선조 후기의 화가 최북(崔北)이 생각난다. 그는 자신의 이름자 북을 해자해서 칠칠(七七)이라고 아호를 지었는데 다분히 냉소적이다. 양반들이라고 으스대는 스놉들을 상대하다 보니까 아니꼬울 때가 적지 않아서 자신을 아예 칠칠치 못한 놈(못난이)이란 뜻으로 비하해서 부른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변종하의 작품 가운데도 냉소적, 해학적인 요소가 없지 않음을 발견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 <돈키호테 이후> 시리즈가 있는데 허참이란 아호와 어우러져 시대를 향한 비판적 의식을 내보이려 한 의도의 단면이 아닌가도 생각되기 때문이다.
가끔 아호 가운데 불교적인 법명이 보이는데 권옥연의 아호 무의자(無衣子)가 그것이다. 평론가 석도륜은 일찍이 출가해서 승려 생활을 했으니까 법명이 어색하지 않다. 그가 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 1950년대 후반 부산에서였다. 처음에는 석현(昔顯)이라고 하다가 서울로 진출한 60년대 초반부터는 석도륜(昔度輪)과 한일자(寒逸子)란 아호를 번갈아 가면서 사용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 와서는 석도륜만을 사용했다. 지금도 가끔 젊은 평론가들이 한일자란 사람에 대해 물어오는 경우가 있다. 내가 60년대 초반부터 평론가로 활동을 시작했으니까 알지 않을까 해서이다. 멋쟁이들이 모자를 수시로 바꾸어 쓰듯이 자리에 따라 이름을 바꾸는 것을 일종의 멋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