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신간, 예술과 인문학 사이

노순택, 『말하는 눈』, 한밤의빛, 2022 / 김이순 외 12인, 『한국 미술 다시 보기』, 현실문화, 2022 / 레거시 러셀, (다연 역),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미디어버스, 2022 / 이영욱 외 8인, 『비평으로 보는 현대 한국미술』, 메디치미디어, 2023 / 김홍기, 『지연의 윤리학』, 워크룸프레스, 2022
다가온 봄, 시나브로 피어나는 꽃만큼이나 미술계에도 볼거리가 많은 계절이다. 겨우내 주춤했던 전시 소식이 연이어 들려오고, 아트마켓도 부산국제화랑아트페어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올해엔 미술과 친해지기로 마음먹었다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전시만이 아니다. 조선의 서화가 유한준이 말하기를,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미술도 다르지 않다. 물론 아는 데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술을 사랑하기에, 그래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이를 위한 신간을 소개한다. 인문학과 미술을 오가는 여기 다섯 권으로 유의미한 첫 단추를 끼워보자.

이영욱 외 8인, 『비평으로 보는 현대 한국미술』, 메디치미디어, 2023 내지.
『비평으로 보는 현대 한국미술』은 미술비평가의 시선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100년을 돌아보는 책이다. 이영욱 김경연 목수현 오윤정 권행가 최재혁 신정훈 권영진 유혜종 등 총 9인의 연구자가 집필에 참여했다. 처음으로 서구식 ‘미술’이 도입된 18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각 필자가 시대를 개관하고 주요 문헌을 선별했다. 엄선된 138편의 글로 당대 비평가가 직접 보고 느낀 미술 격변기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서구의 관점을 내면화하는 시각 장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 해방된 사회를 향한 투쟁 수단, 자의식의 표현 등 미술개념의 변화사를 한눈에 보도록 정리했다. 책의 또 다른 재미는 1950년대 이전 비평의 발굴이다. 원문을 찾아보기 힘들어 제목이나 일부 내용만 전해지던 글을 최초 공개했다.

김이순 외 12인, 『한국 미술 다시 보기』, 현실문화, 2022 내지.
앞의 책이 비평사의 관점에서 한국 미술을 살핀다면 『한국 미술 다시 보기』 시리즈는 ‘이슈’를 중심으로 미술사를 분석한다. 1950년대에서 2008년까지 미술계를 관통했던 문제의식에 초점을 맞췄다. 김이순, 김종길, 정현 등 국내 미술씬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13인의 연구자가 2018년부터 3년간 진행한 워크숍과 세미나, 좌담회의 결과를 엮었다. 당대 미술의 주요 의제와 사건, 문헌 등의 관계를 짚어가며 우리 미술사를 입체적으로 조망했다. 1권은 현대미술의 각 장르가 정립된 시기를 다루고, 2권은 진영 간 격렬한 논쟁이 이어졌던 미술운동에 초점을 맞췄다. 마지막으로 3권은 다각화된 큐레이토리얼 키워드에 주목했다. 각 권의 말미에는 당대 활약한 미술인사의 구술 기록을 실었다. 사료로 남지 않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김홍기, 『지연의 윤리학』, 워크룸프레스, 2022 내지.
다초점으로 보는 아트월드
『지연의 윤리학』은 미술비평가 김홍기가 지난 10년간 잡지, 도록 등을 통해 발표한 글을 정리한 비평집이다. 김홍기는 비평을 ‘미술의 동시대성을 규정하는 작업’이라고 정의한다. 미술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이기에, 미술비평은 현재성과 현장성을 갖춰야 한다. 그가 포착한 동시대성은 ‘지연의 윤리학’이다. “미술은 쏟아지는 선잠에서 인간의 의식을 깨우려는 몸짓이다. 가장 깊은 밤에 느닷없이 들리는 기침 소리와 비슷하다. 거세게 달리는 디지털 시대의 기관차를 지연시키려는 브레이크의 마찰음과 같다. 우리는 동시대미술의 이러한 태도를 지연의 윤리학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에 맞서 판단을 유예하고 충분히 사유할 시간을 갖는 ‘지연’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비디오아트의 슬로 모션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지연의 윤리학’을 동시대예술 전반에 적용했다. 임영주, 전소정, 남화연 등의 미디어아트부터 윤대희, 양유연, 문성식 등 회화까지 장르를 넘나들며 현대미술에 내재한 지연의 미학을 제시했다.

레거시 러셀, (다연 역),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미디어버스, 2022, 내지.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은 큐레이터 레거시 러셀의 첫 저서다. 저자는 2013년에 창안한 ‘글리치 페미니즘’을 토대로 사이버 페미니즘 매니페스토를 집필했다. 사이버 페미니즘이란 디지털 세계를 중심으로 여성의 권리를 증진하려는 뉴 페미니즘 운동이다. 러셀은 여기에 컴퓨터 프로그램의 에러를 의미하는 ‘글리치’를 키워드로 사용한다. 사회가 부여한 성 역할에서 벗어난 여성성은 가부장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결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이러한 결함은 오히려 사회가 제한한 경계를 깨부수는 특이점이다. 러셀은 문제로 치부되던 글리치를 내세워 정체성을 자유롭게 규정할 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책은 줄리아나 헉스타블, 손드라 페리, 보이차일드 등 규범에 도전하는 현대예술가를 중심으로 글리치의 사례를 탐구했다. 또 역사에서 배제된 여성 예술가를 소환해 글리치를 적용하며, 독자를 글리치의 여정으로 안내한다. 디지털과 물질의 경계가 옅어졌듯이, 사이버 페미니즘의 힘은 현실에서도 발휘될 수 있다. 글리치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어젠다가 아니다. 젠더, 인종, 섹슈얼리티의 한계를 무너뜨리는 데에도 글리치는 작용한다. “사람은 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되어가는 것이다.”

노순택, 『말하는 눈』, 한밤의빛, 2022, 내지.
『말하는 눈』은 사진가 노순택의 사유를 응축한 ‘사진론’이다. 노순택은 사진가로서는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아티스트다. 분단 현실을 주제로 삼는 다큐멘터리 사진은 물론, 격동의 작업 현장을 담은 솔직담백한 수필로도 유명하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기자로도 활동한 저자는 한국 사회의 배면을 포착하고, 그 의미를 사진과 글로 표현한다. 특히 신간에서 그가 고찰하는 주제는 ‘사진의 이중성’이다. 밥 먹듯 사진을 찍는 시대에 우리는 사진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다루되,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사진이 곧 진실은 아니지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진실도 아니다. 사진의 주관성은 약점인 동시에 숨은 진실을 드러내는 힘이다. 노순택은 이러한 관점에서 사진의 함정을 무한한 가능성으로 뒤바꾼다. / 김예화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