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자리 조각가’ 별세
한국의 전통 예악(禮樂) 사상을 독자적인 시각 언어로 만든 설치미술가 강서경. 그가 지난 4월 27일 향년 4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인은 암으로 밝혀졌다. 암 투병을 공식적으로 알린 건 2023년 리움미술관 개인전 기자 간담회에서였다. “투병 이후로 검은 머리가 나지를 않는다”라며 너스레를 떨었던 그는 여러 차례 항암 치료를 받으며 분투해 왔지만, 지난 5월 막을 내린 덴버현대미술관 개인전이 마지막 전시가 됐다.
강서경은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자연스레 화가의 꿈을 키웠다. ‘전통’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 2000년에는 이화여대 동양화과 학사를, 2002년에는 동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당시 강서경은 일상 사물을 의인화한 회화작품을 주로 제작했다. 지금 대중에게 알려진 설치작업은 2009~10년 무렵 런던 유학 시기에 시작됐다. 런던 영국왕립예술학교 회화과 석사 재학 시절, 대상의 재현보다 균형과 중용 등 동양화의 정신성을 강조하면서 점차 추상으로 나아갔다.
2013년 스페이스캔에서 열린 첫 개인전은 작가로서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수집한 오브제를 채색하거나 색실로 감아 탑처럼 쌓아 올린 <Grandmother Tower>로 투병 중이던 할머니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2016년에는 전통 예악에 푹 빠졌다. ‘악(음악)’을 구성하는 언어(시), 음률(가), 춤(무)을 모티프로 고유한 회화론을 창출했다. “글과 글씨, 그림이 하나로 융화되는 ‘시서화의 일치’처럼 동양화에서 회화란 개인의 인식과 사유 체계가 담긴 ‘입체적 공간’이다.”
2014년경 선보인 <정>과 <모라> 연작, 2017년 <자리> 연작이 강서경의 대표작이다. 세 연작은 별도의 의미를 지니면서도 강서경의 조형 원리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다. <정>은 나무 프레임과 철을 창틀처럼 조합한 구조물이다. 조선시대 악보 체계인 ‘정간보’에서 음의 길이와 높이를 표시하는 ‘정(井)’ 자에 영감을 받았다. 사각의 그리드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동시에 주변 풍광을 끌어들인다. 음절의 최소 단위를 뜻하는 <모라>는 캔버스 옆면에 흘러내린 물감의 흔적으로, 시간의 층위를 보여주는 회화작업이다. 강화도의 화문석 장인과 협업해 제작한 형형색색의 <자리>는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애쓰는 개인의 노력을 형상화했다.
2020년대 강서경은 산수(山水)를 조형의 대상으로 내세웠다. 거대한 자연과 개인의 서사가 어우러지는 ‘예술의 낙원’을 상상했다. 2023년 리움미술관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인 <산-봄/여름/가을/겨울> 연작은 색칠한 철골에 실, 가죽 등을 감고 엮어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산세를 다채롭게 표현했다. 기운생동의 부조 조각으로 진경산수를 현대화해 큰 주목을 받았다. 작가의 생애 마지막 전시는 <산-시간-얼굴>(2. 21~5. 4 덴버현대미술관)이다. 회화 조각 비디오 설치 퍼포먼스 등 70여 점으로 20년간 작품 세계를 집약했다.
강서경에게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형상과 보이지 않는 공간을 모두 인지하고, 그 안에 무엇을 채워 넣을지 고민하는 과정 그 자체였다. 작가는 말했다. “나에게 작업이란 한 개인이 자신의 목소리와 움직임, 생각을 아름답고 균형 있게, 서로 부딪치지 않으면서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의 그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