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립 미술관의 역사를 쓰다

사비나미술관, 토탈미술관, 플랫폼엘컨템포러리아트센터
2026 / 04 / 01
박찬용 <바라보다> 혼합재료 80×122×195cm 2022 사비나미술관 제공

미술관의 시간은 ‘발언’이다. 개관 10주년부터 50주년까지 각자의 좌표에서 한국 동시대미술의 ‘오늘’을 쌓아온 미술관들이 일제히 기념전을 앞두고 있다. 그 주인공은 사비나미술관, 토탈미술관, 플랫폼엘컨템포러리아트센터(이하 플랫폼엘). 회고가 아닌 질문으로, 아카이브가 아닌 실천으로…. 이들이 시간 앞에 던지는 큐레이토리얼 전략을 하나씩 따라가 본다.

개관 30주년을 맞이한 사비나미술관은 <1만 일의 시간, 미술이 묻고 사비나가 답하다>(2. 6~4. 19)전을 마련했다. 사비나미술관은 한국 미술사에서 ‘동시대성’과 ‘융복합’이라는 화두를 선제적으로 던져왔다. 예술과 과학을 접목한 <기상청과 함께하는 2000 일기예보>(2000), <예술과 과학의 판타지>(2005) <NEO SENSE(新감각)>(2010), 대중문화의 시각 언어에 주목한 <영화와 미술의 만남, 시각서사(視覺敍事)>(2004), <예술 입은 한복>(2023) 등 다양한 장르를 가로지르며 미술의 확장 가능성에 천착했다.

이번 특별전은 한 사람이 태어나 서른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 1만 일, 그 무게를 세 개 테마로 나눠 담았다. 메인 섹션 ‘10,000일의 질문–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는 창작의 이면에 자리한 불안과 고독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김성룡 강홍구 안지산 안창홍 이이남 유현미 한진수 홍순명 등 작가 23인이 작품 46점으로 참여했다.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야 하는 중압감, 실패에 대한 두려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 전시는 예술가를 영웅도 천재도 아닌, 두려움에 떨면서도 작업을 끝내 놓지 않는 평범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불안이 삶의 장애물이 아니라 인간을 자극하고 성장시키는 동력임을 일깨운다. 특히 사비나미술관과 오랜 호흡을 맞춰온 작가의 작품이 눈에 띈다. 1996년에 문을 연 사비나갤러리가 사비나미술관으로 재개관한 2002년에 개인전을 가졌던 안창홍은 1990년대 격변하던 사회상을 그려낸 초기 대표작을, 이곳에서 첫 미술관 개인전을 열었던 권여현은 <신윤복-야금모행>(2004)을 공개했다.

김성룡 <새벽> 캔버스 위에 아크릴릭 198×147.6cm 2023-2024 사비나미술관 제공

두 번째 ‘10,000일의 동행-초상화로 말하다’는 김나리, 남경민, 박불똥, 유근택, 일라이 리드, 함명수 등 16명의 작가가 이명옥 관장이 쌓아온 1만 일을 각기 다른 시선의 초상화로 그려냈다. 현직 미술관장을 모델로 삼아 다수의 작가가 작품을 남기는 것은 미술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록이다. 척박한 미술환경에서 작가들의 결정적 순간을 함께해 온 동지에 대한 화답이다. 마지막으로 아카이브 섹션 ‘큐레이션의 지평을 열다’에서는 전통과 과학 기술 등 ‘융복합’ 큐레이토리얼 개념을 한국 미술계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게 했던 미술관의 기획과 실험을 총망라했다. 이명옥 관장은 개관 30주년을 맞아 “상업화, 대형화되는 한국 미술계에서 개인이 운영하는 미술관으로 30년을 버텨왔다. 지난 1만 일을 돌아보며 다시 버틸 힘을 다지고자 한다. 아울러 한국의 전통문화와 미술을 결합함으로써 ‘K-뮤지엄’의 가능성을 넓히고 싶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강애란 <지혜의 타워링> 나무, 플라스틱, 거울, LED 277×370×323cm 2016 플랫폼엘 제공

한편, 플랫폼엘은 개관 10주년을 맞아 <하루키를 말할 때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3. 27~8. 2)전을 꾸렸다. 플랫폼엘은 전시, 퍼포먼스,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과 담론이 교차하는 하이브리드 프로젝트를 선보여 왔다. 2018년에 개최했던 개관 2주년 기념전 <성좌의 변증법>에서 설치, 스크리닝, 퍼포먼스 등으로 다원예술의 축제를 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하루키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일본 문학의 거장 무라카미 하루키의 삶과 문학 세계를 시각예술로 번안했다. 도쿄 와세다대 국제문학관(무라카미하루키라이브러리)과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는 재즈 바이닐, 육필 원고, 편지 등 하루키의 소장품은 물론, 작가와 30년 넘게 호흡을 맞춘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의 원화 200여 점을 공개한다. 여기에 강애란, 김찬송, 순이지, 이원우, 한경우가 하루키의 철학을 작품으로 풀어냈다. 또한 뮤지션 장기하와 ‘만찢남 셰프’ 조광효 등이 하루키의 문장에서 영감을 얻은 경험을 소장품과 자필 메시지로 공유한다. 전상언 디렉터는 “문학과 시각예술, 음악 등이 어우러진 입체적인 전시를 기획하고자 했다. 읽는 행위를 넘어 듣고 체험하는 경험을 통해 관람객이 각자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길 바란다.”라고 전시 취지를 전했다. 10년간 진행해 온 다원예술 지원 사업 <플랫폼엘라이브아츠프로그램> 역시 새로운 모습으로 공개될 예정.

마지막으로 개관 50주년을 맞이한 토탈미술관은 특별전 <뮤지엄 0년>(가제)의 예열을 마치고 본격적인 전시 구현에 돌입했다. 전시를 통해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고, 다가올 50년을 향한 새로운 도약에 나선다. 전시의 지휘봉은 토탈미술관 전시기획실장을 역임한 이영철 큐레이터가 잡았다. 그는 일찍이 전시를 사회 비평과 공공 디자인을 아우르는 전방위적 공론장으로 승화한 대표 주자다. 특히 그가 2004년 토탈미술관에서
기획했던 <당신은 나의 태양>전은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약 45년간의 한국 미술을 ‘동시대성’이라는 관점으로 집대성한 웰메이드 전시였다. 작가 개개인의 실존과 당대의 시대 현실을 연결해 한국 미술의 흐름을 하나로 엮었다. 이번 <뮤지엄 0년>전 역시 단순히 미술관의 화려한 과거를 회고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그간 토탈미술관 전시가 품고 있던 당대의 문제의식을 동시대 맥락으로 다시 호출해 앞으로 어떤 화두로 확장할 수 있는지를 새로이 모색한다.

<당신은 나의 태양>전 전경 2004 토탈미술관

소장품을 평면적으로 나열하는 아카이브 방식을 탈피한 점도 눈에 띈다. 신작은 물론 오브제와 첨단 기술 등을 적극 동원하여 시간의 층위를 가로지르는 큐레이토리얼적 실천을 꾀했다. 기금 없이는 제대로 된 전시를 꾸리기 어려운 미술생태계, 블록버스터급 거장 개인전을 연이어 오픈하는 국공립 미술관 사이에서 사립 미술관의 역할과 책임을 다시 묻는다. 노준의 관장에게 미술관은 작품을 전시하는 곳 그 이상이다. “기획자와 작가, 관객이 서로의 사유와 감각을 자유롭게 확장할 수 있는 장이다. 토탈미술관 또한 계속해서 새로운 실험과 예술적 직관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남고 싶다. 이번 기념전 역시 한국 미술을 성찰하는 동시에 우리가 지향해 온 예술적 열망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